“필요 이상으로 강압적으로 느껴지네요. 잘 합의하자고 하는 조정인데 규칙안에 법 조직의 무거운 표현을 넣을 이유가 없지 않나요.”
지난 10월 26, 27일 양일간 강원도 문막에서 열린 전자상거래분쟁조정위(EC분쟁조정위)원회 하계 워크숍. 조정규칙안 개정(안)을 최종 검토하는 자리에서 송상현 위원장(서울대 법학과 교수)의 지적이다.
소비자보호원피해분쟁조정위원회 6년, 손해보험분쟁조정위원회 6년, 저작권분쟁심의조정위원회 6년, 컴퓨터프로그램분쟁조정심의위원회 6년. 송 위원장이 꼽는 대표적인 분쟁조정 관련 경력만 봐도 ‘분쟁조정’에 관한 송 위원장의 이력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법원에서 구성하고 있는 분쟁조정과 관련된 전문인력 풀에 국내 법조인 대다수가 속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분쟁조정에 관련된 송 위원장의 ‘철학’을 듣고 있자면 법조인으로서 이같은 조정활동이 그저 이름만 걸어놓은 생색내기나 ‘단순한 봉사활동’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중재만 해도 중재합의가 우선 있어야 하죠. 이 합의에 의해 중재가 진행되면 중재판정은 구속력을 갖게 됩니다. 그 결과에 무조건 동의해야한다는 거죠. 그러나 조정은 다릅니다. 분쟁 당사자들이 제3자를 조정인으로 선임한 후에 진행되는 조정결과는 대부분 그 결과가 법적효력을 갖지 않습니다.” 현재 십여개에 이르는 행정기관들의 분쟁조정 중 법적효력을 갖는 것은 소비자보호원의 조정결과(조정조서) 만이다. 그렇다면 송 위원장이 대부분 법적효력을 갖지 못하는 조정을 왜 중요시하는 걸까.
“조정은 ‘당사자자치의 원칙(사적자치)’을 가장 높게 살리는 분쟁 해결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조정 결과가 법적 효력을 갖지 못한다해도 자율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자는 의지에서 출발한다는 겁니다.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른 분쟁이 점차 많아지는 사회가 되면서 만일 조정의 역할이 제대로 자리잡히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송 위원장의 이같은 소신은 60년대 미국 유학시절에 만들어졌다. 코넬대학에서 공부할 당시 송 위원장은 조정학을 처음 접했다고 한다. ADR(분쟁해결) 과목을 이수하며 그 때부터 ‘조정의 미학’에 빠졌다는 것. 그러나 귀국했을 때 국내에 조정학이나 저작권법, ADR에 대한 관심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80년 후반을 넘어서며 슬슬 나오기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의 조정의 역사다.
조정이 당사자 자치의 원칙이라는 법의 기본적인 원리를 살렸다는 이유 말고도 송 위원장은 기술분쟁만큼은 가능한 한 조정으로 해결할 것을 강조한다. 소송을 하면 절차상의 공정성이야 만족할 수 있겠지만 소송은 길면 몇 년에 걸쳐 진행되고 비밀도 보장되지 않는다. 요즘처럼 기술주기가 짧은 상황에서 이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거다. 공학도 대상의 특강에서는 ‘기술분쟁은 조정이나 중재로 해결하라’는 점을 몇번이고 강조하는 송 위원장의 소신이다.
그렇다면 EC는 어떨까. ‘인터넷과 법률’은 송 위원장에게도 쉬운 주제는 아니다. “EC의 생명은 무엇보다 신속함이라고 봅니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거나 오프라인으로 행하던 많은 관련 행위를 사이버상으로 옮기려는 노력을 하는 이유는 그에 들어가는 기회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조정의 미학을 강조하는 송 위원장이 EC에서 발행하는 분쟁을 법원으로 옮겨가라고 할 리 없다.
그럼에도 현재 EC분쟁조정위를 맡고 있는 송 위원장의 역할은 쉽지 만은 않다. 우선 조정의 역사만 보자면 EC분쟁조정위보다 다른 행정기관의 조정이 앞서고 있고 경쟁관계라는 오해도 받고 있다. 최근 전자거래기본법 개정과 맞물려 일부에서 현 EC분쟁조정위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아예 그 기능을 다른 부처 소관으로 넘기자는 주장이 이는 것도 기관이나 부처간 미묘한 관계 때문이다.
그러나 송 위원장은 ‘조정위를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판단’이라며, EC분쟁조정위의 충실한 활동을 이끌어갈 것임을 강조한다. EC 관련 조정을 어디서 하느냐 보다는 ‘어떻게 어떤 수준으로 하느냐’에 초점을 두고 판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런 기준에 비출 때 현 EC분쟁조정위 소속 28명 위원들의 전문성이나 위원들의 조정활동 참여의지, 특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분쟁 조정을 사이버에서 처리한다는 점은 송 위원장이 다른 분쟁조정위에 비교해 강점으로 내세우는 요건들이다. 이번 전자거래법 개정과 무관하게 조정규칙안을 개정하고자 적극적으로 나서는 조정위원들의 가장 큰 힘이다. 이런 결과로 일본 EC 관련 협회에서 EC분쟁조정위 활동을 벤치마킹해 똑같은 형태로 분쟁조정위를 설립하는 성과를 올렸다.
송 위원장은 조정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진다고 강조하며, 그에 맞는 여건들이 갖춰져야 한다고 말한다. 분쟁조정의 공적 권력기관으로서 법원의 역할은 분명 존재하지만 법원조차 폭주하는 소송에 속수무책이다. 또 더 큰 범주에서 보면 조정은 사회문화적인 문제로 바라볼 수 있다. 소위 ‘갈등과학’ 학문이나 ‘협상학’으로 인식, 조정의 문화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행정기관뿐 아니라 법원에서조차 분쟁조정위원회 활동을 강화하고 있는 추세인데 대학에서는 아직까지도 조정학을 별도 과목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저 민사소송법에서 한 분야로 다뤄지고 있고, 협상을 위한 한 방법으로 ‘시뮬레이션’ 성격의 강의가 대학원에서 있을 뿐이죠.” 법학 과목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고 또 조정위원들의 전문성도 강화시켜야 한다.
송 위원장은 지난해 4월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또 99년부터 재단법인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 3대 이사장을 맡고 있다. 98년 사회 봉사활동을 할 때가 됐다는 판단으로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이사를 맡은 게 인연이 되면서다. 굳이 왜 아동문제냐는 질문에 대한 송 위원장은 “어린이들이 부모를 택해서 태어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나마 기아나 심장병은 관련 재단도 많고 관심을 받고 있는데 소아암은 여전히 관심 밖에 있더군요.” 어린이와 같은 약자들에 대한 나눔이 큰 사회라면 재판보다는 중재나 조정이 많은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사회가 돼 있을 법하다.
△41년 출생 △63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62년 14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63년 16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68년 미국 튜란대 법학석사 △69년 미국 코넬대 법학박사 △74∼78년 독일 함부르그대 법대 훔볼트 방문연구원, 미국 하버드대 법대 방문연구원 △82년 서울대학교 법학대학 교수 △78년∼현재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인 △93∼99년 한국소비자보호원 소비자분쟁 조정위원 △97∼현재 특허청 특허행정 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98∼현재 외교통상부 지적소유권부문 통상교섭 민간자문그룹 자문위원 △99∼현재 대한중재인협회 상임위원 △2001∼현재 한국디지털재산법학회 회장 △2001년 8월∼현재 산업자원부 산하 전자거래분쟁조정위원회 위원장
<신혜선기자 shinhs@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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