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30)요람일기(상)

1904년 2월 8일

 ▲대구 전사장(電司長)의 전보(電報) - 【그제 하오 4시경에 부산과 창원의 전보사가 불통되더니 어제 아침에 충전양사(忠全兩司)가 또 불통되어 각각 공두(工頭:수리원)를 보내어 보수케 하고 통신을 기다리고 있자니, 어제 하오 7시경에 대구에 진주하고 있는 일본병참소 위관이 ‘일본정부의 명령이라’하고 ‘한성, 인천, 창원, 부산은 국내외를 물론하고 영문 및 국문 어느 것도 접수하지 말 것이며, 명전(明電:일반 전보문)만 받되 본대 파견인의 지휘에 따라 시행하라’며 ‘각처의 전신이 불통이다’고 하자 ‘보수하지 말라’하니 어찌 조처해야 할지 회시(下燭伏望)를 바랍니다.】

 ▲대구 우사(郵司)의 전보 - 【일본 병참소에서 이후로 들어오고 나가는 외국인 서찰을 검사한다 하니 조치 바랍니다.】

 

 ○ 1904년 2월 9일

 ▲대구 전사장의 전보 - 【일본군 부위가 통역 1명을 데리고 오늘 상오 9시경에 본사에 와서 ‘암호 전보문은 내·외국을 물론하고 통신하지 말되, 일본관보는 일본전보로 발송한다’며 이를 참모부 명령이라 하기에 본관이 본원(통신원)의 훈령이 있기 전에는 멋대로 할 수 없다 하자, 그 부위도 참모부에 다시 전보를 쳐서 알아본다 하니 조치 바랍니다.】

 ▲부산 우전양사장(郵電兩司長) 보고 - 【이 달 6일 하오 4시경에 일본 군인이 와서 우전양사를 점령하고 관원과 원역의 출입을 금지하며, 사무를 간섭하고 선로를 끊고 자기 멋대로 연결하고 있어 우편물을 육상으로 발송하니 조사바람(10일 접수).】

 ▲창원 우전양사장 보고 - 【이 달 6일 하오 4시경에 일함 1척이 입항하여 병정 백여명이 양사를 점령하고 양사 관원의 출입을 금하여 통신할 수 없으니 조치바람(10일 접수).】

 ▲대구 전사장 전보 - 【일본 군인들이 국문 암호전보를 접수하지 못하게 하니 어찌 조치할지 회교바람(동일접수). 국문 전보를 일인이 만류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어 이미 외부(外部)에 알려 일본 공사관에 이유를 알아보도록 했으니 그리 아시라(동일 발송).】

 

 1900년대 초,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정세는 어지러웠다. 허약한 왕권과 쇠락할 대로 쇠락한 민심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외국의 영향 아래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었고, 일본과 러시아는 한반도를 놓고 노골적인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일본과 부동항을 얻고자 하는 러시아가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힘이 없는 중립국 선언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이미 전쟁을 각오한 일본은 치밀한 침략야욕을 구체화시켰고, 그 진행 과정에서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이 통신시설의 장악이었다.

 일본은 전쟁 개시에 앞서 1903년 한성과 인천에 이어 개통된 한성과 평양의 전화선을 강제로 군용화 하는 등 무력을 앞세워 우편 및 전기통신사업을 침탈하기 시작했다. 위의 인용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은 대한제국 내는 물론 해외로 발송되는 암호전보의 취급을 금지했고, 창원과 부산 전보사를 강제로 점령했다. 대구 전보사에 침입하여 멋대로 전보를 검열하였으며, 진주 전보사를 점령하고 이에 항거하는 진주 전보사장을 무단 감금했다. 이렇게 하여 한반도에서 러시아보다 훨씬 유리하게 통신시설을 장악한 일제는 이를 전술에 이용하여 러일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드디어 1904년 2월 6일, 일본은 러시아와 국교 단절을 선언했다. 이어 2월 8일에는 뤼순항의 군사시설을 기습 공격했고, 2월 9일에는 인천 앞 바다에서 대기하고 있던 러시아 전함 코데스호와 와리야크호 등을 공격, 침몰시킨 뒤 곧바로 군대를 서울로 향하여 불법 진주시켰다.

 2월 10일에서야 러시아에 대해 공식 선전포고를 한 일본이 초반부터 기선을 잡게 된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불법적인 선제공격과 함께 전장이었던 한반도의 통신을 장악, 러시아측의 연락을 두절시킨 데 있었다. 특히 인천 앞 바다의 러시아 함대에 대한 기습공격에 성공한 것은 전적으로 일본전신국에 의한 전보 횡취(橫取)에 힘입은 바가 컸다.

 당시 인천에 정박중이던 러시아 함대는 뤼순에 있는 극동사령부의 지휘아래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일본전신국은 러시아 극동사령부와 공사관, 함대, 부산주재영사관 상호간 이용하던 전보를 고의적으로 지연시키고 이를 압류, 배달치 않았다. 통신이 두절된 지 2일 후, 러시아 함대는 일본측의 방해 공작을 눈치채고 뤼순까지의 정찰 계획을 세웠다. 4일 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러시아 함대는 2월 9일 뤼순을 향해 출항하기 위해 인천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때 대기중이던 일본 군함이 러시아 함대를 기습, 침몰시켜 버렸다.

 일본이 압류한 당시의 전보 가운데에는 극동 사령부가 인천항에 정박중이던 함대에 내린 철수 명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뤼순의 극동사령부와 함대간 정상적인 통신이 이루어졌다면 러일전쟁 개전 초기의 전세에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는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본은 러일전쟁 전에 철저하게 우리나라의 통신권을 장악한 뒤에 전쟁을 도발했다는 점이다. 당시에도 통신이 군사적으로 전술가치가 높다는 것을 일본은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초전에 승기를 잡은 일본은 1904년 2월 13일, 우리의 모든 전기통신시설을 일본군이 점용 하겠으니 허락하라고 강요해 왔다. 대한제국은 무력했다. 결국 일본은 승인없이 한성전보총사로 침입, 전화기를 따로 설치하고 일본이 운영하던 경성우편국 사이에 전선을 가설하여 각지로부터 오는 전신과 전화를 연접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저지른 불법행위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필사본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당시 통신원 체신과장이었던 김철영(金澈營)이 남긴 ‘요람일기(要覽日記)’가 바로 그 문헌이다.

 ‘요람일기’는 통신원 체신과가 일본과 러시아 양군의 통신기관 침범 실태와 이에 대처한 통신원의 조치내용을 국한문을 혼용한 일기체로 기록, 통신사료로 귀중하게 분류되고 있는데 천(天)권과 지(地)권 두 개의 책으로 구분되어 천권은 체신기념관에, 지권은 서울대 규장각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요람일기’를 지은 김철영은 한성과 부산간 전신선이었던 남로전선(南路電線)이 개통되면서 동래분국의 전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전무위원은 정 7품 이하의 기술을 담당하는 직위로 보여지는데, 그가 어디서 전신기술을 익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남로전선의 개통 초기부터 관여했다는 것은 예측할 수 있다.

 이후 김철영은 1894년 정부기구의 개편으로 새롭게 발족한 공무아문(工務衙門)의 전신국 주사로 임명되었다. 전신시설을 담당하던 부서인 전우총국(電郵總局)이 공무아문으로 개편되면서였다. 개편된 이유 중 하나는 전우총국 독판을 해임하고 총판으로 임명하여 통신을 담당하는 부서의 격을 낮추기 위해서였다.

 1904년 통신원 체신과장으로 승진한 김철영은 이때 발발한 러일전쟁 당시 일본과 러시아의 통신침탈 사항을 요람일기에 기록, 우리니라 통신역사의 한 장을 이어 놓았다.

 ‘요람일기’의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거론한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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