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영화 중에 ‘뉴욕의 가을’이란 영화가 있었다. 단풍이 곱게 물든 뉴욕을 배경으로 매력적인 리처드 기어와 위노나 라이더 커플의 사랑이야기로, 개봉 당시 상당한 관심을 끈 영화였다.
‘뉴욕의 가을’은 제목부터 장르, 음악, 출연진, 영화 내용에 이르기까지 외형적으로 모든 것을 갖췄다. 붉게 물든 낙엽이 쏟아져 내리는 황량한 가을의 도시 속 낭만을 다루었고, 로맨티스트 리처드 기어와 상대역인 위노나 라이더의 미모도 매력적인 요소가 되었다. 또한 영화 전편에 흐르는 음유시인 가브리엘 야레가 입힌 수채화 같은 섬세한 선율도 여성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배경음악이 되었다. 또한 주요 배경이 맨해튼으로 국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목을 ‘뉴욕의 가을’이라 하여 뉴욕이란 도시의 상업성을 충분히 활용한 영화였다.
그 영화의 중간 중간에는 노랗게 물든 뉴욕의 저녁노을을 화면 가득하게 담아내고 있다. 아름다운 노을과 함께 우뚝 솟은 두 개의 건물, 세계무역센터(WTC) 전경이 따라 잡혔다. 화면 구조상 뉴욕의 상징물인 110층 높이 쌍둥이 빌딩은 아름다운 노을과 한 컷처럼 어울려 인식되었다. 뉴욕, 특히 맨해튼을 이야기 할 때 세계무역센터의 상징적 의미를 결코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세계무역센터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세계에서 네번째로 높은 건물, 상주인구 5만명, 유동인구 15만명이 이용하는 쌍둥이 빌딩이 비행기 테러로 인한 충격과 화재로 전 세계로 직접 중계되는 상황에서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지난 9월 11일의 일이었다.
세계무역센터의 붕괴는 우리나라의 삼풍백화점 붕괴의 40배 이상에 해당하는 초대형 사건이다. 소설에서도 현 상황을 그대로 묘사했을 때 지나친 허구라서 설득력을 가지지 못할 만큼 가공할 만한 대사건이다. 무너진 건물과 함께 수천명의 인명이 함께 묻혀버렸고, 영문도 모르는 채 죽어간 테러에 활용된 비행기 승객의 비극도 우리를 안타깝게 했다.
당시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던 승객들이 범인들의 눈을 피해 지상으로 전화를 하여 여객기 피랍 사실과 범인들의 인상착의,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알려주기도 했다. 비행기 연료로 인해 화재가 발생한 세계무역센터에서도 고립된 한 사람이 전화를 통해 몰려드는 화염에 스스로 창밖으로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급박한 상황을 죽음 직전까지 밖으로 전한 안타까운 사실도 있었다.
워싱턴포스트 15일자에는 세계무역센터의 북쪽 빌딩 86층에 있던 제임스 가튼버그(35)라는 사람의 전화 사용에 관한 내용을 기사화 했다. 세계무역센터가 테러 비행기와 충돌한 후부터 건물이 완전히 붕괴할 때까지 한시간 동안 외부와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인 전화로 가족과 친구들과의 통화를 통해 필사적인 구조를 요청하고, 아내와 딸에게 사랑을 전한 내용으로 당시 빌딩에서의 긴박한 상황을 재구성하여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가튼버그는 부동산 회사의 세일즈맨이었다. 그는 사무실에 도착한 후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벽과 천장이 뒤흔들리면서 연기가 차오르는 상황에 직면했다. 계단통로를 찾았으나 이미 방화문의 차폐가 이뤄진데다 위층에서 무너져 내린 잔해로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가 급하게 찾은 것이 전화였다. 전화는 폭발과 화재에도 불구하고 정상 작동되고 있었다.
가튼버그는 여객기가 건물과 충돌한 아침 8시 45분부터 건물이 무너지기까지의 한시간 동안 아내와 어머니, 2명의 친구, 회사 상사 등과 통화를 했다. 때로는 두 사람과 동시에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건물이 붕괴되기 직전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로 “통화량 폭주로 뉴욕과 전화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어 그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아내와 2살 짜리 딸이 자신에게 전부라는 말을 전했으며 두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전화가 끊기고 약 15분 후 세계무역센터 건물 하나가 폭삭 주저앉았다. 이 때가 10시 5분. 이후 10시 28분 가튼버그가 있던 북쪽 빌딩도 붕괴됐다. 그와 통화를 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후 가튼버그와는 더 이상 아무런 연락도 취할 수 없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그 상황에서, 건물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전화로 통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비행기와 충돌하면서 발생한 충격과 화재에 전화선로가 무사했다하더라도 당시 뉴욕의 상황을 감안할 때 온전한 통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매우 경이로운 일이다.
모든 통신 시스템은 일정한 비율로 동시에 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회선을 책정하여 운영한다. 경제적 이유로 전화에 가입된 사람 모두에게 전화 회선을 단독으로 제공하지는 않는다. 통상적으로 100명의 가입자당 12개 내외의 회선이 부여된다. 100명의 가입자 중 12명 이상의 이용자가 동시에 전화를 사용하기 위해 수화기를 들게되면 이후의 이용자들은 발신음을 듣지 못한다.
발신음뿐만이 아니라 시외나 외국으로 나가는 회선도 마찬가지로, 평상시 트래픽에 따라 사전에 정해진 회선만 운영하고 있다. 가입자가 많다고 해도 해당 시외나 국제를 이용하는 이용자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돌발 상황이 발생하고 한꺼번에 수화기를 들게되면 통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급기야는 교환시스템이 다운돼 버리고 만다. 처리할 수 없는 많은 양의 부하가 걸리게 되면 컴퓨터 스스로가 동작을 멈추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통신시스템의 운영형태는 최근 보편화 되고있는 ADSL 회선도 마찬가지로, 통신 사업자가 무제한 단독 IP를 허용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통신사업체에서는 허용 회선을 환경에 따라 어느 정도 여유있게 책정하고, 회선의 수도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능동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당시 뉴욕에서와 같은 상황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전화를 걸기 위해 수화기를 들게 마련이다. 지하철과 자동차 등의 모든 교통편이 차단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외부와 통할 수 있는 전화에 집착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로가 온전하다 해도 통화폭주 때문에 정상적으로 전화를 사용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시간 동안 통화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인지 모른다.
이러한 경우에는 전화 사용을 최소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나도 쓸 수 있고, 남도 쓸 수 있다. 급박한 상황에서 남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긴급한 상황일수록 정신을 차리는 지혜가 필요하게 된다.
당시 뉴욕에서는 외부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는 전화였다. 영화 ‘뉴욕의 가을’에서처럼 샬롯과 윌킨이 사랑을 속삭이고, 샬롯을 살리기 위한 윌킨의 노력을 의사에게 전해주는 도구가 아니라, 고통과 죽음의 현장을 외부로 전하는 도구로 전화가 활용되었다. 기적적으로 연결된 전화도 마지막 위로의 말이 전해지는 아픈 매체였다.
사고 현장이 빨리 정리되어 활기찬 뉴욕, 노랗게 물든 노을이 아름다운 뉴욕이 되고, 경기가 회복되는 소리, 진정한 패권을 위해 겸손해지는 소리,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가 전달되는 뉴욕의 전화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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