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명저>나와 너 

 나와 너 -마틴 부버 지음 -문예출판사

 

 “우리가 어떤 길을 가다가 맞은 편에서 같은 길을 걸어오고 있는 사람과 만났다고 할 때, 우리는 다만 우리가 걸어온 쪽의 길만 알 뿐 상대편이 걸어온 쪽의 길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다만 그와의 만남에서 그가 걸어온 길을, 말하자면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나와 너’라는 완전한 관계의 과정에 있어서도, 우리는 다만 우리가 살아온 양상에 따라서 우리가 살아왔다는 것, 우리가 걸어온 길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상대편이 걸어온 길은 다만 우리에게 마주쳐지는 것일 뿐이고, 우리는 그 길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것을 마치 만남 저편의 어떤 것인 양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메모: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사물에 대해서 종종 ‘안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 사람의, 또는 그 어떤 것을 어느 정도 깨닫거나 겪거나 상호관계를 맺게 됐을 때 ‘안다’라는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익히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것에서, 주변 인물에게서 전혀 뜻밖의 면모를 발견하고 놀라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그래서 그 사람에게 그런 면모가 있었던가 놀라기도 하고 그것에 그런 기능과 성질이 숨어 있었던가 새삼 자신의 무지를 깨닫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쉽게 안다는 ‘착각’에 빠지는 걸까. 고작해야 함께한 시간만큼, 그 대상이 보여준 면만큼, 더구나 보여준다고 해서 다 볼 수도 없고, 우리가 볼 수 있고 파악할 수 있었던 만큼에 불과한데, 그런데도 왜.

 우리의 섣부른 ‘아는 척’이 대상에 대해 안다는 것은 바로 대상에 대해 갖고 있는 힘이듯 대상을 조정하고 이용할 수 있는 지배력을 획득하거나 과시하고픈 내밀한 욕구의 발로이거나 고독한 존재자로서 대상에 대한 이해와 앎을 통해 대상과의 절대적 교통(交通)이나 합일(合一)에 이르고픈 애처로운 기대감의 표출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 여름, 대상에 대한 나의 ‘앎’이 과연 진정한 것인지 점검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양혜경기자 hkyang@etnews.co.kr>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