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15)청일전쟁과 정보통신(중)

 청일전쟁 당시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양 3국의 정보통신망은 크게 보아 중국의 상하이와 일본의 장기간을 연결하고 다시 러시아까지 이르는 해저전선과, 중국 상하이로부터 톈진, 봉천을 거쳐 의주에서 조선의 전신선과 연결되어 한성과 인천에 이르고, 다시 남로전선을 통하여 전주, 부산을 통해 해저전선으로 일본 장기까지 이어지는 통신망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정보통신망은 동양 3국을 연결하는 2대 간선 중의 하나였던 만큼 그 중요성과 의존도가 매우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조선은 물론 청국과 일본의 통신망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동학농민군에 의해 호남이 완전히 유린되고 급기야 전주도 점령당하게 되었는데, 1894년 4월 27일 동학군이 전주 외곽에 당도하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동학군이 방금 전주로부터 30리 지점까지 당도하여 잠시 멈추고 있다’는 내용의 전보를 조정으로 보낸 뒤 성을 비우고 도주했다. 이 전보를 마지막으로 전주와 중앙 조정과의 전보 연락은 끊기고 말았다. 이어 다음날인 4월 28일에 동학군은 저항 없이 전주성에 입성하고 전주전보국을 그들의 도회소(都會所)로 삼았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정보통신에 관련된 내용을 조선정부와 화해의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전보는 다폐민문(多弊民問)하니 철파(撤罷)할 사’

 정부에 요청한 폐정개혁 요구조항 가운데 동학농민군은 ‘전보는 다폐민문하니 철파할 사’라는 항목을 넣고 있다. 동학농민군이 전보시설의 철폐를 요구한 것은 전보가 그 동안 민중을 탄압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불신 때문이었다. 선로가설에 따른 전봇대의 공출과 가설에 따른 부역 등으로 민폐가 심하였고, 가설된 전선도 민중을 위한 활용성이 전무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동학농민군의 핵심세력은 민심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보의 철폐를 외쳤을 것이다.

 정부에 대한 폐정개혁 요구 전에도 동학농민군은 전선과 전봇대를 닥치는 대로 끊어 버리고 잘라 버렸는데, 이로 인해 호남지역을 통과, 부산까지 이어진 남로전선은 완전히 통신이 두절되었다. 남로전선은 동학농민군의 철수 후에도 선로의 보수가 여의치 못하여 1897년 12월 전주전보사를 재개할 때까지 한성, 공주간의 통신만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농민군 봉기를 이유로 조선에 진주한 청국과 일본군은 조선의 통신망 확보에 최선을 다했고, 그 와중에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 조선정부는 속수무책 당하고만 있었다. 특히 조선정부의 철군요청을 묵살하고 동양 3국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조선의 안정이 필요하고 그 안정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내정개혁이 선행되어야 하므로 조선의 내정개혁이 완수될 때까지 철수할 수 없다고 버틴 일본은 자체 통신망을 가설하고 전쟁개시의 명문확보를 위해 트집과 군사적 압력을 내세우고 있었다.

 청국은 이 과정에서 조선에서 열세에 있는 군사를 증강시키기 위해 영국 상선을 임대하여 군대를 수송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고승호’도 군사와 병기, 그리고 군자금을 가득 싣고 아산만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하지만 ‘고승호’를 비롯한 병력 수송선의 출발시간과 움직임은 일본의 스파이에게 철저하게 감지되어 일본 본국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1894년 7월 25일 오전 7시 52분.

 일본 군함은 먼저 ‘제원호’에 포격을 가했다. 이어 청국함대에서도 반격을 위한 포격을 시작,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했다. 이 전투로 청일전쟁은 시작되었고 조선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세력의 축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풍도 앞바다에서 해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호위함 ‘조강호’는 ‘제원호’가 보낸 비상신호를 알아차리고 즉각 배의 방향을 바꾸었지만 ‘고승호’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직진, 풍도 앞바다 전투해역으로 들어섰다. ‘고승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일본 군함 ‘나나오’. 이 배의 함장은 훗날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도고 헤이하치로 대령이었다. 이때 도고 함장은 ‘고승호’가 영국국기를 달고 있다는 사실과 청국 군병을 가득 싣고 있다는 것을 스파이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청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해전을 벌이게 될 것을 예측하고 있었던 도고 선장은 영국 국기를 단 ‘고승호’가 청국군에게 불법으로 점거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해 공격을 했다는 구실을 생각하고 ‘고승호’를 나포할 계획으로 정선명령을 내렸다. 당시 ‘고승호’의 선장이었던 골드워지는 이를 받아들여 배를 멈추었다. 그러나 ‘고승호’에 타고있던 청국군의 반발로 골드워지 선장은 다시 태고항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도고 함장은 ‘고승호’에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1시간 정도의 대치가 이어진 후 ‘고승호’를 나포할 수 없다고 생각한 도고 함장은 ‘고승호’에 대해 어뢰와 대포의 발사를 지시했다. 비록 군인이 타고 있었지만 무장하지 않은 상선에 어뢰와 대포를 발사한 것이었다. ‘고승호’는 이내 검은 연기를 내면서 침몰하기 시작, 7월 25일 오후 1시 46분 완전히 바다속으로 침몰했다.

 도고 함장은 ‘나나오’의 보트를 내려 ‘고승호’에 탄 영국인 승무원만을 구조하였고, 대부분의 청국 병사는 배가 침몰하면서 일으킨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풍도 앞바다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일본함대는 도주하는 청국배들을 추격하여 ‘조강호’를 나포하고 ‘제원호’는 일본 함대를 겨우 따돌리고 경기만을 빠져나가 여순항으로 도망쳤다. 또한 ‘광을호’는 전속력으로 도주하다 울도 근해의 작은 섬에 좌초되어 화약고가 폭발, 침몰해 버리고 말았다.

 풍도해전에 완승을 거둔 일본은 청일전쟁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고 이어 육상에서도 청국을 압도할 수 있었다. 풍도해전이 있었던 7월 25일 아산 동북 성환에 주둔하고 있던 청국 진지를 향해 진격, 청국군을 퇴각시키고 이어 9월에 있었던 평양전투에서 나머지 청국 주력부대를 섬멸하였다. 특히 청국군은 비내리고 천둥번개치는 야밤을 틈탄 평양성 철수과정에서 이를 눈치챈 일본군의 매복에 의해 처참하게 궤멸당하고 말았다.

 조선에서 청국 세력을 밀어낸 일본은 청국이 관할하던 한성전보총국과 인천과 한성, 의주를 있는 서로전선을 전리품으로 접수하고 즉각 군사용으로 전용했다. 서로전선은 가설 당시 일정기간 청국이 대리로 운영하게 되어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일본이었지만 전리품이라 하여 강제로 점유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조선에서 운영하고 있던 북로전선의 관할권도 강탈해 갔다. ‘양국의 교의(交誼)에 비추어 일본군의 전선차용을 승인한다’는 내용에 조선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형세였다. 1895년 3월 청일간에 강화조약이 조인됨으로써 청일전쟁은 일단 종식되었지만 조선의 완전한 침탈을 노리고 있던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접수, 점용한 전신선로를 조선정부에 반환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조선의 정보통신 사업은 크게 위축되었으며 일본군용전신망이 그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조선정부에서는 관보연락 등 각 지방과의 통신을 위해 일본군용통신소를 활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정부의 모든 정보를 일본군의 통신망을 통해 노출시킨 채 보내고 받아야 했던 것이다.

 조선의 비극이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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