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재계의 큰 이슈 중 하나는 오프라인 기업들의 연합이었다. 코오롱 이웅열 회장, SK 최태원 회장, 현대산업개발 정몽규 회장 등. 이들은 십여개 이상의 기업을 끌어모아 벤처캐피털사를 만들고 e마켓도 설립했다. 뿐만이 아니다. 이들은 여기에 성공한 벤처기업의 오너들을 끌어들여 전경련 산하 e비즈위원회를 발족했으며, 브이소사이어티라는 법인을 설립해 ‘비즈니스를 위한 정보 공유의 공식화’를 선언했다.
이런 상황은 기업의 연합보다는 젊은 재벌 2, 3세들의 연합이라는 면에서 더욱 주목받았다. 기업의 전략제휴가 과거부터 내려온 사업의 한 행태라고 할 때 사실 새로울 것은 없다. ‘시장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기업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오프라인 기업, 특히 그룹 차원의 공동행보는 시기적인 면과 해당 사업분야 또 그 범위가 오프라인 기업 총수들로 국한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그것과 같은 수준이 아님은 확실하다.
◇무엇이 다른가=업계에서는 이들이 처한 지금이 과도기라는 점을 강조한다. 과도기라 함은 우리 경제가 동일하게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다는 의미다.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현재 모습에서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결정해야 한다. 짧게는 5년 후부터 10년 후 기업을 책임져야 한다. 시장과 기술의 주기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게 빨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과연 자신만만할 수 있겠는가.” S그룹 관계자가 총수들의 공동 행보에 대해 개인적인 단서를 달아 피력하는 견해다. 자칫 잘못하면 21세기 한국 경제 중심에서 밀려날 수도 있고, 또 상황에 따라선 주도 기업으로 급부상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 시기. 지금은 현재와 미래를 읽어내는 힘을 키우는 것이 더 급하지 결코 경쟁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혼자 다 할 수 없는 e비즈니스=이들의 공존이 e비즈니스 분야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유는 e비즈니스가 소위 21세기 경제로 표현되는 디지털경제의 중심 축이기 때문이다. 재벌 총수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 아무리 성공했다 해도 이 삼십대 벤처 사장을 파트너 위치에 놓는 이유는 이들이 젊은 세대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혼자 다 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이와 관련, 한 벤처기업 대표는 “벤처투자든 신규사업이든 지난해 인터넷을 향해 덤벼든 대기업 중 대다수는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시행착오야말로 이들이 사업의 동등한 주체로서 벤처를 바라보게 만든 실전경험이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본 게임에 들어갔을 때다. 특히 국내 시장에서 대기업과 벤처가 제 역할을 갖고 공조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한다. 이같은 주문이 벤처기업보다 재벌기업 총수에게 기울어있다면 이는 당연히 ‘자본의 힘’ 때문이다. 벤처기업 한 관계자는 “지금은 벤처 사장과 재벌 총수가 한 자리에 앉아 산업을 논할지 모르지만 이 암중모색의 시기가 끝난 후도 이들의 관계가 이렇게 지속될지는 지켜볼 일”이라고 말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미래의 총수들이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무엇보다 현재의 자신들을 존재케 해준 환경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지금의 재벌을 키우기 위해 행했던 선대들의 전근대적인 경영방식을 버리고 거듭날 때 이들이 선택하는 디지털경영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혜선기자 shinhs@etnews.co.kr>
◆브이소사이어티 재계의 새로운 문화의 단초되나◆
지난해 9월 설립된 브이소사이어티(대표 이형승). 지난해 들어 유독 회동이 잦아 주목받았던 2세 경영진이 브이소사이어티를 만들었을 때 대부분은 ‘국내에도 사교클럽이 공식화됐다’는 반응을 보였다. 점수를 좀 후하게 쳐주면 ‘재벌들이 벤처기업 지원에 나선다’는 정도였다.
이형승 사장은 이 모두를 부정한다. 브이소사이어티는 결코 사교클럽도 아니며 특히 벤처캐피털로 오해해 투자에 나서지 않는 것을 무작정 비판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브이소사이어티는 비즈니스를 위한 정보공유의 장이다. 이 모임을 법인으로 만든 이유도 오히려 단순한 사교모임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다.”
매주 목요일, 외부에게 철저히 공개되지 않고 운영하는 정기 모임은 지금까지 35회를 넘었다. 이 모임에서 전문가를 초빙해 강의를 들은 회수는 서너번 정도. 좌중 앞에서 주제발표를 하며 땀을 뻘뻘 흘리는 총수의 모습이나 기업 총수와 벤처 사장간 시장과 기술에 대한 격의 없는 토론이야말로 브이소사이어티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이다. “오너들이 모든 것을 혼자 다 할 수 없음을 분명히 깨닫고 있는 만큼 이들이 이끄는 재계의 풍토도 변할 것”이라고 말하는 이 사장은 좀 더 지켜봐줄 것을 부탁한다.
◆삼성, 21세기에도 홀로 설 것인가◆
애매하긴 하다. 삼성측 말마따나 사장도 회장도 아닌 자격으로 먼저 출발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는 명분이 약하다. 경영수업에 들어간 이재용 상무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삼성은 여전히 혼자다. 어느 때보다 기업들간 합종연횡이 활발히 벌어진 지난해에도 삼성은 여전히 외부와의 의사소통을 차단, 홀로이기를 고집했다. 대신 공식적으로 그룹이 해체됐지만 삼성은 사장단이 참여하는 수요회를 꼬박꼬박 개최하고 있다. 전문가로부터 시장의 이슈에 대한 강연도 듣고 정보도 공유한다.
업계에서는 이런 삼성의 ‘제일주의’ 경영방침이 끝까지 갈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한다. 이재용 상무보가 사장 직함을 달고 공식적으로 경영 전면에 나서기까지 최소한 4년이 걸린다고 할 때 즉, 2005년경 재계의 지형이 어떻게 변화돼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시기는 타그룹 모두 단기적인 구조조정을 완료하고 2010년을 향한 전략을 구체화할 시기다. 물론 삼성도 마찬가지다.
그룹에 따르면 오는 8월경 5∼10년 후 삼성계열 각사가 주력품목을 중심으로 한 장기비전 내용이 일단 취합될 예정이다. 이미 전자 4사 사장단들이 회동한 데 이어 삼성전기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발표했다. IMF 이후 분사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지만 삼성도 구조조정에서는 예외가 아닌 듯하다.
<신혜선기자 shinhs@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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