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은 살아있다>(2)세계 일류를 지향한다

◆「일류 기업을 만들겠습니다」 「글로벌 일등기업으로 거듭나겠습니다.」

대기업이든 중소 벤처기업이든 웹사이트에 나온 최고경영자(CEO)의 인사말은 한결같다. 모두 일류, 일등 기업이 되겠다는 선언 일색이다.

이 표현으로도 모자라 「초일류」 「초우량」 등의 수식어도 등장한다.

이들 기업 가운데 몇 %만 목표를 이뤄도 우리는 곧바로 미국·일본과 같은 경제 강국이 될 듯하다. 실현될 수 있을까. 세계속에서 우리 산업의 현주소를 살펴보자. 국내 기업을 통틀어 명실상부한 세계 일류 기업은 10여개사에 불과하다. 대부분 전자 조선·철강 등 특정 산업에 집중됐다.

우리는 선진국에 비해 뒤늦게 산업화했다. 10여개사라도 세계 시장을 좌우한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공이다.◆

일등 기업은 일류 가운데에서도 단 한 기업만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당장은 이류기업이나 일류 기업으로 도약할 잠재력을 가진 기업이 얼마나 많은가다. 기아자동차를 포함한 현대자동차·삼성전자 통신부문 정도를 손꼽을 수 있다. 오히려 일류 기업보다도 적다.

물론 덩치가 작은 산업에서 일류 기업의 자리에 오른 중소기업들도 더러 있으나 극히 드믄 예일 뿐이다.

국내 업체로선 일등은 고사하고 일류기업에 드는 것조차 버겁다. 선발 업체가 쌓아놓은 벽이 워낙 공고하기 때문이다.

세계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메가컴피티션」시대에는 일류기업만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정보화의 확산으로 전세계 소비자들은 자신에게 최고의 품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들의 제품을 선호하게 됐다. 결국 이러한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기업만이 일류 기업이 될 수 있다.

국내 전자업체가 이러한 어려움을 뚫고 일류기업의 반열에 오른 분야는 유독 부품분야가 많다. D램·브라운관·TFT LCD·편향코일(DY) 등에서 국내 업체들은 세계 정상을 달리고 있다.

이들 분야의 공통점은 대규모 투자를 필요로 하는 장치 산업이라는 점이다. 국내 업체들은 투자 부담을 겪은 선진국 업체들이 사업을 축소하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성공했다.

또 다른 공통점은 국내 업체들이 처음에는 생산기술로 시작해 응용기술과 이제는 기초기술까지 확보해 명실상부한 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반도체나 TFT LCD분야 엔지니어들이 기술을 이전받기 위해 쏟은 땀과 눈물은 익히 알려져 있다.

부품산업이 일류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스템 분야에서도 일류 기업이 등장했다. 국내 모니터·통신장비·DVD플레이어 업체들은 값싸고 품질좋은 국산 부품을 쓰면서 경쟁력을 확보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성공은 밤새워 연구한 엔지니어들과 세계 어느 곳이든 가리지 않고 뛴 영업 인력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국내 일류 전자업체들이 자리한 곳은 이제 세계적인 생산 단지로 발돋움했다.

이들 대기업이 자리한 곳에는 관련 부품 협력업체와 장비업체들이 밀집해 거대한 단지를 형성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현대전자가 있는 중부권은 반도체 밸리를 형성하고 있으며 LG전자·LG필립스LCD·삼성SDI·오리온전기·삼성코닝·한국전기초자 등이 밀집된 영남권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디스플레이 생산 기지다. LG이노텍이 있는 호남권은 광부품 단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일류 기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역 경제에 큰 활력소로 작용하는 셈이다.

그런데 국내 일류 기업들이 지금의 성공에 만족해선 안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어렵사리 일류기업의 반열에 올랐으나 언제든지 몰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디지털시대는 일류만으로도 불안하다. 인터넷으로 촘촘히 연결된 글로벌 마케팅 시장은 순식간에 몰락할 수 있다.

이는 세계 게임기 시장을 장악한 닌텐도와 세가엔터프라이즈가 최근 후발주자인 소니의 급성장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IBM은 80년대 최대 이익을 냈으나 90년대 초반 최대 적자로 돌아서기도 했다.

몇년전 모 다국적 화학회사 회장은 『일류만으로 부족했다. 일등이 돼야 안심하고 경영할 수 있었다』고 토로했다.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는 속담도 경영환경이 초스피드로 바뀌는 디지털시대에는 전혀 맞지 않는 속담이다.

국내 일류 기업들을 보면 여전히 핵심 부품과 기술을 외국업체에 의존하고 있다. 부품업체들만 해도 관련 부품 소재와 장비를 수입해 쓰는 실정이다.

일류 기업이기 때문에 구입 가격에서는 경쟁사들에 결코 불리하지 않으나 장기적인 경쟁력 차원에서 보면 심각한 상태다.

이와 관련, 국내 부품업체들은 그동안 솔로로 앞질러가던 태도에서 할걸음 비껴나와 국내 협력업체와의 공동 개발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특히 이같은 노력은 디스플레이업체들에서 두드러진다.

삼성전자·LG필립스 등은 핵심 반도체 소재와 장비를 외산에 의존해온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최근 기술 개발 단계에서부터 관련 소재와 장비업체들과 협의하고 개발한 제품을 우선적으로 구입하려 한다.

하지만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최고의 부품소재와 장비를 써야 하기 때문에 무조건 국산만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이다.

구자풍 한국디스프레이연구조합 사무국장은 『지금까지 디스플레이소자 기술을 개발하는 데 연구개발자금을 집중했으나 앞으로는 소자업체는 물론 부품·소재와 장비업체들이 공동 개발하는 쪽에 무게중심을 둘 방침』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한 고위 관계자도 『협력업체들도 무조건 소자업체들에 도움을 요청할 게 아니라 소자업체들이 마음놓고 쓸 만하게 제품력을 높이는 한편 가능성 있는 분야에 집중해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중소 협력업체들의 경쟁력이 높아지면 국내 전자산업의 기반도 더욱 탄탄해질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 시스템업체들의 경쟁력도 한결 세질 것이다.

중국과 같은 후발 경쟁국들이 급부상한 상태에서 이는 더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다.

또 국내 일류기업들도 한 단계 더 나아가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일류기업만이 살아남는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몇 안되는 일류 기업의 역할에 산업계의 기대가 갈수록 높아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