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삼국지 아시아 IT 대로망>19회-중화파이(中華牌)

니룬펑(倪潤峰) 창홍전자 총재(55)는 늘 밤늦게 귀가한다. 집에 왔다고 일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미처 처리하지 못한 결재서류를 다시 꺼낸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읽지 못했던 조간 신문을 뒤적여 본다.

30년을 이렇게 보냈다. 니룬펑은 허투루 시간을 보내는 일이 거의 없다. 남들처럼 낚시나 골프와 같은 취미생활도 없다.

그는 중산층 연봉의 100배인 100만위안을 연봉으로 받는 성공한 기업가다. 그렇지만 니룬펑은 연봉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일하는 게 좋은 일중독자다.

다롄(大連)대 기계공학원 출신의 그는 군수업체인 창홍에 입사해 연산 1000만대 능력의 중국 최고의 TV회사로 성장시켰다. 총재 자리를 맡은 지는 벌써 15년이 흘렀다. 니룬펑의 요즘 관심사는 디지털가전제품이다.

「일본과 한국업체들은 분명히 디지털기술로 우리를 따돌리려 할 게 뻔해. 뭔가 수를 내기는 내야 할텐데….」

창홍에 대한 일본과 한국업체들의 견제는 날로 거세어졌다.

디지털TV니 DVD플레이어니 첨단 제품을 경쟁적으로 미국시장에 내놓으면서 창홍을 비롯한 중국업체의 제품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외치고 다닌다.

니룬펑은 어찌할 수 없었다. 기존 TV나 비디오CD플레이어야 이미 한국, 일본, 유럽 제품과 견줄 정도의 품질력을 갖췄으나 차세대 디지털 제품에서는 아직 기술력이 달린다. 그러나 니룬펑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디지털TV와 같은 차세대 제품에 대한 기술력 확보도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바는 물론 필립스, C큐브, 톰슨 등 유명 전자기업들은 이미 창홍과 손을 잡았으며 다른 회사들도 제휴하려 안달이다. 거대한 중국시장에 뛰어들기 바쁜 업체들이 너도 나도 서로 기술을 주려고 줄을 서 있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또다른 무기는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이 달라졌더라고 가전제품은 가전제품이야. 늘 가격이 변수지.」

소니, 마쓰시타, 도시바 등 일본업체들과 삼성전자, LG전자 등 한국업체들은 미국시장에 DVD플레이어를 250∼300달러에 팔고 있다. 창홍은 200달러 밑으로 판매한다.

원천기술과 특허를 가진 일본업체들이야 끄떡없으나 한국업체들은 벌써 흔들린다. 중국업체들은 한국업체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업체에 기술 로열티를 내야 하나 정부가 나서 협상하기 때문에 부담해야 할 로열티가 한국업체에 비해 반밖에 되지 않는다.

이를 모두 가격 인하에 써버리니 한국업체들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창홍의 저가 경쟁은 자국내에서도 악명 높다. 중국의 TV시장은 수요보다 생산이 더 많아 업체마다 치열한 가격 경쟁을 벌이고 있다. 여러 업체가 모여 최저가격을 제한하자고 합의할 정도로 가격 경쟁이 심하다.

이러한 가격경쟁에 불을 댕긴 기업이 창홍이다. 창홍은 96년 봄 TV값을 대대적으로 인하하기 시작해 거의 2년에 한번꼴로 가격을 낮췄다. 목적은 분명했다. 늘어나는 TV업체수를 줄이고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서다.

경쟁사들은 경악했지만 창홍의 가격 인하정책은 사실 정부의 보호 아래 이뤄졌다. 중국 정부는 100개 가까운 생산업체가 난립한 중국의 TV산업을 구조조정하려 한다.

이게 아니더라도 창홍은 중국 정부에 꼭 필요한 기업이다. 중국 정부는 최근 국유기업의 개혁과 서부 대개발에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 서부 지역 관문인 쓰촨성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성공적으로 변신한 국유기업 창홍에 중국 정부의 관심도 남다르다.

지난 98년 취임때 『3년안에 국유기업들을 만년 적자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국유기업 개혁을 선언한 주룽지(朱鎔基) 총리는 『더도 말고 창홍같기만 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쓰촨성은 경제 개혁과 밀접한 곳이다. 문화대혁명 이후 등장한 덩샤오핑이 주창한 개혁이 처음 출발한 곳이다. 20여년전 농촌개혁의 상징인 향제(鄕制) 간판이 쓰촨성 광한시에서 걸렸다.

창홍은 50년대만 해도 항공기용 레이더를 만드는 국유기업이었으나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파산 위기에 놓였다가 니룬펑이 되살려놓았다.

창홍은 내륙지방으로 교통이 나쁜 곳이어서 TV회사가 있기에 썩 좋은 곳은 아니었다. 니룬펑은 그러나 시장을 보는 눈이 있었다.

그는 서부 내륙의 거대한 시장에 주목, 성도인 선양시에서 시작해 주변시장을 조금씩 장악한 후 90년대 하반기 이후 가격전쟁을 벌여 최대 TV제조회사로 발돋움시킨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니룬펑은 이곳 쓰촨성에 있던 촉나라의 군사로 중원을 향해 내달았던 제갈량과 곧잘 비유된다.

창홍이 중국 TV산업의 대표인물이라면 산둥성의 하이얼은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 백색가전에서 강점을 가진 회사로 창홍과 중국 가전 산업의 양대 산맥이다.

산둥성은 공자의 고향으로 유교의 발상지다. 이 때문인지 장루이민(張瑞敏) 하이얼 총재는 중국 전통을 바탕으로 외부 힘을 활용하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철학을 갖고 있다.

유교적 관리 전통을 바탕으로 미국식 혁신과 일본식의 집단적인 관리를 접목시킨 경영철학이다.

장루이민은 니룬펑과 마찬가지로 쓰러져가는 회사를 일으켜 세웠다.

장루이민은 사업이 3등 밖으로 떨어지면 포기했다. 그대신 될 만한 사업에 집중했다. 이른바 「선택과 집중」이다. 이를 통해 장루이민은 하이얼을 중국 최대의 가전업체로 발돋움시켰다.

니룬펑과 장루이민은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을 성공시킨 별중의 별인 것이다.

두 사람은 성실성을 제일로 친다. 학창시절을 문화혁명기에 보내 고생하면서 체득한 것이다. 장루이민은 고등학교 졸업후 강제노역을 떠나야 해 대학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성실성은 대고객서비스가 생명인 가전사업에서 두 회사의 성장에 밑거름이 됐다. 하이얼의 한 배달직원이 자동차가 고장나자 세탁기를 메고 2시간 산길을 걸어가 배달한 것은 아직도 전설로 남아있다.

니룬펑과 장루이민은 이제 최대 생산업체라는 명성에 만족하지 않는다. 최대 생산은 마치 싸구려제품 양산과 일시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가격보다는 품질로 인정받고 싶다.

하이얼은 지난 99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연산 20만대의 냉장고 공장을 지었다. 외국업체들이 어떻게든 중국에 생산기지를 두려고 몰려드는 상황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중국보다 미국의 인건비가 비싸나 현지 실정에 맞게 품질과 디자인 수준을 높이려면 현지에 공장을 둬야 한다는 게 장루이민 총재의 생각이다.

「먼저 힘든 곳부터 공략한다(先難後易)」 장루이민의 지론이다.

창홍이 중국 TV산업의 거인이라면 커룽(科龍)전기와 TCL그룹은 「거인의 어깨에 탄 난쟁이」들이다.

커룽과 TCL은 주력인 컬러TV를 바탕으로 컴퓨터, 인터넷, 통신 등 종합정보기술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커룽전기와 TCL은 청홍이나 하이얼과 달리 개방경영과 속도경영을 중시한다. 아마도 서방문화의 세례를 가장 많이 받은 광둥(廣東)과 광시(廣西)지방에서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들 기업의 성공으로 중국은 세계 최대의 가전생산 메카로 떠올랐다.

중국의 가전산업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수출산업이지만 부품산업에 막대한 파급 효과를 내고 있다. 특히 가전업체들이 디지털가전제품에 집중하면서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중국 부품산업도 본격적인 도약 단계에 접어들었다.

또 멀티미디어가 급진전하면서 중국의 가전산업도 정보기술(IT)산업과 접목되면서 강력한 힘을 갖기 시작했다.

소니, 마쓰시타, 삼성전자, LG전자 등 한국과 일본의 가전업체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이 대목이다.

중국 가전업체들은 지금까지 가격으로 외산 제품을 중국 땅에서 쫓아냈으며 이제는 세계 가전시장을 휩쓴다. 앞으로는 품질로 경쟁하려 들 것이며 잠재력은 이미 검증됐다.

「중화파이(中華牌)」.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뜻이다.

중화파이의 이미지는 지금까지 「싸구려」였다. 의류나 완구뿐만 아니라 가전제품도 그랬다.

이제 니룬펑과 장루이민은 중화파이에 소니제품과 같은 고급제품의 이미지를 심어가려 한다. 이들이 겨냥한 첫번째 과녁은 한국 가전업체들이다.

「한국제는 아직 고가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다지지 못했어. 우선 가격으로 한국업체를 무력화시키자. 그 사이 현지 유통망과 품질력을 갖춰놓으면 일본업체와도 충분히 싸울만 해.」

니룬펑 총재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그는 디지털시대에 대한 걱정에서 한결 자유로워졌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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