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필사즉생 필생즉사

원철린 산업전자부장 crwon@etnews.co.kr

「백척간두(百尺竿頭)」. 백자나 되는 높은 장대끝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롭고 어려운 지경을 일컫는다. 여기서 벗어 나는 길은 오직 한가지뿐이다. 백척간두에서 살 수 있는 길은 그 벼랑끝에서 다시 한 발자국 나아 가는 것이다. 중국의 옛 선사중에 석상이라는 화상의 말이다.

죽음을 각오해야만 백척간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으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라는 말과 통한다.

연초부터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현대전자 처리에 꼭 들어 맞는 말이다. 현대전자의 해법도 여기서 찾아야 한다. 지난 연말부터 벌어진 정부의 움직임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지난 연말 산업자원부 장관이 삼성전자 공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삼성전자의 최고경영자에게 현대전자의 지분 인수를 요청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런 보도에 대해 산자부와 삼성·현대측 3자는 부인하고 있다.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싶다. 정부는 현대전자 문제로 고민하면서 어떠한 형태로든지 현대전자 처리에 개입하려고 했을 것이다.

현대전자는 세계 제 2위의 D램 메이커인데다 부채가 연간 매출액보다 많은 재무구조로 올해중 만기 도래하는 회사채 3조4000억원을 산업은행에서 인수해주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자금난을 겪고 있다.

더구나 현대전자의 주력제품인 64MD램의 미 현물시장가격이 제조원가 수준에도 못미친 3달러 이하로 떨어지고 있어 앞으로 지난해와 같은 수익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정부 입장에선 현대전자를 이대로 방치해 둘 수 없었을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현대전자가 우리 경제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 가야 할 일이 있다. 현대전자의 문제는 단순히 현대의 경영 잘못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문제가 이렇게 된데는 정부가 추진했던 반도체빅딜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따라서 정부는 현대전자의 해결에 앞서 먼저 반도체 빅딜정책의 실패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이같은 반성없이 또 다시 반도체빅딜을 추진하는 것은 반도체산업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일이다.

물론 산자부 입장에서는 반도체빅딜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실패를 자인하기 싫어 삼성전자에 현대전자를 인수토록 했을 것이다. 이러한 잔수는 또 다른 실패를 불러올 수 있다. 삼성전자의 현대전자 인수는 국가적으나 경제적으로나 아무런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우선 현대전자의 부채가 너무 많다. 매출액이 70억달러인데 반해 부채가 100억달러에 이르고 있다. 더구나 반도체가격이 떨어지면서 적자생산이 불가피한 현실에서 현대전자를 떠안게 될 경우 삼성전자도 부실로 떨어질 수 있다.

삼성전자는 이미 잘못된 기업인수로 곤욕을 한번 치른 적이 있다. 94년∼95년 반도체의 호황때 벌어 들인 돈으로 미국 컴퓨터업체인 AST사를 인수해 고스란히 수십억달러를 날려야 했다. 이 잘못으로 삼성전자는 어려움을 맞기도 했다.

만일 99년도의 반도체 호황이 조금만 늦었으면 지금의 삼성전자는 없었을 지 모른다. 이런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는 삼성전자가 또다시 현대전자를 인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막대한 투자를 단행해야 할 시점에 현대전자를 인수해서는 투자를 할 수 없다. 투자없는 회사는 미래를 담보할 수 없어 삼성전자의 미래마저 불투명해질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산자부 개입자체가 국제적인 분쟁소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와 현대전자는 세계시장의 4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이런 두 회사가 가격 및 생산량에서 전략적 제휴를 논의했다는 자체만으로도 불공정 시비를 낳을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이 한국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다. 자국의 업체가 한국업체와의 경쟁에서 밀려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마당에 이를 곱게 보아넘길 리 없다.

요모조모 따져보아도 삼성의 현대 인수는 아무런 실익이 없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현대전자 처리에 개입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버려야 한다. 반도체업체들이 스스로 회생방안을 찾도록 해야 한다. 회생방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반도체빅딜 이전으로 되돌아 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현대전자의 청주공장과 구미공장을 독립시켜 LG측에 넘기는 것이다. 물론 LG가 현대에 넘겼을 때에 비해 오히려 가치가 떨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와 LG가 굳이 이를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현대는 자금난을 극복할 수 있고 LG는 전자산업의 핵심기술인 반도체기술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몸집을 가볍게 한 후에 현대전자는 보유하고 있는 자산 처분과 외국업체와의 합작 방안을 찾으면 된다. 반도체 시황도 하반기쯤 가면 좋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 때문에 업계 자율적으로 무난히 극복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오히려 산자부는 미래를 위한 기술개발에 대한 장기적인 지원 방안을 찾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그래야만 현대전자의 문제에서 벗어나 우리 반도체산업이 살아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