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이 풀어진 탓일까. 아니면 피 말리는 접전을 치른 후의 피로감이었을까. 차세대이동통신(IMT2000) 사업권을 위해 숨막히게 달려온 예비주자들의 실무책임자들은 사업계획서를 제출하자마자 어김없이 「홍역」을 앓았다.
거의 탈진상태에 빠져 꼼짝없이 이틀을 누워 있어야 했던 사람도 있고 긴장 후유증으로 느닷없는 안면근육통에 시달려야 했던 책임자도 있다. 그 와중에 이들이 약속이나 한듯 되뇌는 한마디가 있다. 진인사대천명. 사람으로 할 일은 모든 정성을 모아 다했으니 이제 하늘의 결과만 기다릴 뿐이라는 것이다.◆
시작됐다.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힘들고 고단한 IMT2000 사업자 선정 레이스가 드디어 개막된 것이다. 그들(예비주자)은 지금껏 경험하고 쌓아온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답안지(사업계획서)를 작성했고 이제 채점관(심사위원)의 점수 매김만을 남겨 뒀지만 정작 건곤일척의 승부. 사업권 당락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사실 지난 수십년간 이만한 빅게임이 벌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공룡들이 사운을 건 정면승부에 나섰고 정보통신기업, 자동차를 비롯한 일반 제조업체, 물류유통업체 등 대한민국에서 이름깨나 알려진 대기업·중소기업·벤처기업들도 모조리 편을 갈라 특정 컨소시엄에 합류, 거대 사업자군을 형성했다.
사업권 획득 여부를 한편으로 숨죽이며 한편으론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보고 있는 것은 이들뿐만이 아니다. 소위 「시장」의 핵심인 증권가에서는 사업권 향배에 따른 각 컨소시엄의 기업 가치를 따지기에 여념이 없고 개미군단들도 「대박」의 꿈을 안고 투자처를 저울질하고 있다.
명색이 세계적 대기업인 삼성전자와 LG전자·현대전자도 자신의 「내일」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 채 사업권 신청업체들의 희비에 「목」을 매고 있는 형편이다. 한마디로 온 나라가 IMT2000 사업권에 휘말려 있는 꼴이다.
정권의 필요에 의해 특혜성으로 사업권을 내주던 개발 독재시대에는 어림도 없던 일이 일상으로 일어나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개인휴대통신(PCS)을 비롯 무선호출·무선데이터 등 각 신규 통신사업자를 선정했던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전국이 사업권 열풍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PCS와 IMT2000 사업권을 겨냥하는 기업들에겐 천양지차다. PCS는 따면 좋고 안되면 그만이었다. 미래의 성장사업에 참여한다는 가능성에 승부를 걸었기 때문에 탈락했더라도 당장 기업의 존폐가 거론되는 사안이 아니었다.
IMT2000은 다르다. 아예 퇴로가 없는 싸움이다. 합격통지서를 받아들어야 본전이고 불합격이면 곧바로 퇴출 위기에 몰린다. 주가로 표현되는 기업 가치는 곤두박질할 것이고 당장의 사업성마저 불투명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예비주자들에겐 IMT2000 사업권이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아니라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은 막아줄 안전판이다. 이들이 모두 기존 통신사업자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막강한 한국통신이라도 세계 최대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사업자인 SK텔레콤이라도 한국 2위의 거대 재벌이자 글로벌사업자인 LG라 할지라도 사업권을 못받는다면 통신사업을 접어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됐다.
실제로 예비사업자들은 사업권에서 배제되는 상황은 일단 제쳐 놓고 따내더라도 자신들이 희망하는 비동기식 사업권을 획득할 경우와 그렇지 못할 경우를 가정, 시장이 「추위」를 느낄 만한 자료를 내놓고 있다.
SK텔레콤은 비동기사업자로 선정되면 별 문제지만 만약 동기사업자로 결정될 경우 일본 NTT도코모와의 전략적 제휴협상은 물 건너 갈 공산이 크다. 또 비동기식에 비해 동기식으로 사업을 시작한다면 기업 가치가 적어도 2조∼3조원 이상 하락할 것이라는 외국계 투자분석가들의 리포트도 나와 있다.
한국통신 역시 연말이나 늦어도 내년까지 이뤄질 해외 자본유치 과정에서 제값을 받으려면 비동기사업권 획득이 필수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동기식으로 선회한다면 몸값이 급전직하, 비동기에 비해 4조원 이상의 기업가치 하락을 감수해야 하고 이는 곧바로 국부유출 논란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LG도 이미 PCS 분야에서 세계 랭킹 3위의 종합통신사업자 BT와 지분을 제휴한 상태고 IMT2000에서도 일본의 다국적 연합군인 재팬텔레콤과 기술 영업 등 포괄적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가장 먼저 비동기를 전제로 사업계획을 추진, 고지를 선
점한 판에 동기로 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문제는 이른바 빅3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벼랑끝 싸움을 벌인다는 데 있다. 이들은 불과 한달 전만 해도 정부의 「도움(?)」 덕택에 기술표준을 서로 유리하게 결정하는 것이 현안이었지 사업권 자체를 의심받지는 않았다.
석 장이 배정된 사업권에 대시하는 것은 빅3뿐이었고 자연히 특별한 하자만 없다면 사업권 자체는 따논 당상이었다. 이 구도가 하나로통신의 등장으로 헝클어졌다. 하나로통신은 유일한 동기 신청자로 무혈입성을 노리고 있다. 국익수호, 재벌의 경제력 집중 배제, 국민기업화 추진 등을 앞세워 IMT2000 사업권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이제 비동기를 신청한 빅3는 누군가가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하고 만약 하나로통신이 동기 티켓을 거머쥔다면 동기로 재신청하는 재수의 기회마저 박탈당한다. 통신시장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진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이들 4사의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출연금 점수는 어차피 똑같을테니 100점 만점의 심사평가에서 당락이 결정될 것이다. 기업의 재무구조 등을 평가하는 계량 평가는 간단하다. 수학 공식처럼 각사의 수치를 컴퓨터에 입력하면 곧바로 채점 결과가 나온다.
심사위원단이 점수를 매기는 비계량 평가의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
어떤 케이스건 PCS의 예를 볼 때 당락은 1점대 미만에서 갈릴 가능성이 높다. 0점대 박빙의 승부로 간다는 것이다.
예비주자 4사는 저마다 사업권 획득을 「확신」한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기분이 절정인 내달 26일께 운명의 여신은 이들에게 서로 다른 대답을 주게 될 것이다.
<이택기자 etyt@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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