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커스 김형순 사장
현재 우리는 문명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살고 있다. 근대 유럽인이 꿈꾸었던 패러다임은 치유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부딪히면서 그 위기를 노출했다. 근대문명 핵심축의 하나인 과학의 전형이던 뉴턴식의 결정론 및 선형 방정식의 가장자리에서 시간의 비가역성과 카오스적 확률이 등장해 확실성의 이상이 무너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경제의 영역에서도 정보기술 산업의 발달로 기존 굴뚝경제의 패러다임 안에서는 이해할 수 없고 가치를 잴 수 없으며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기존 패러다임의 한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역사적 역할이 다했음을 의미한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은 이 틀 안에서 성립했던 규칙들이 더이상 불변의 진리나 법으로 통용되지 않음을 뜻한다. 따라서 패러다임의 변혁기에는 규칙변경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세계적인 비디오예술가인 백남준의 말대로 우리는 기존의 규칙에 따라 행동할 수도 있지만 규칙을 바꿔서 행동할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변혁의 시기는 서로 모순되는 다양한 규칙이 혼재하는 과도기로 규정될 수 있다. 그래서 과도기는 모순들이 충돌하는 위기의 시기이고, 이것인가 아니면 저것인가의 선택을 강요받는 시기다.
이 선택에 따라서 우리의 생존과 번영이 결정된다. 하지만 우리는 규칙변경에 대해서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기존의 규칙이 영원한 것도 아니고 기존의 논리가 보편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디지털 경제에서는 모든 정보가 디지털화된다. 디지털화는 비트의 형태로 컴퓨터에 저장된 정보가 다중 네트워크를 거쳐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먼 것과 가까운 것이라는 기존의 인식이 바뀌게 된다. 구경제의 논리로는 어디까지나 가까운 것은 가까운 것이고 먼 것은 먼 것이다. 그러나 신경제에서는 가장 가까운 것이 가장 멀 수도 있고 가장 먼 것이 가장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런데 패러다임의 변화는 각 방면에서 다소의 시차는 있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이로써 오늘날 대중문화 안에서 벌어지는 크로스오버와 퓨전의 움직임이 신경제의 논리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신경제에서도 크로스오버와 퓨전이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고정된 범주 도식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범주간의 상호교차와 범주 안의 요소들이 그 경계를 벗어나 다시 이합집산하는 상호발산과 상호수렴이 일어나고 있다. 모든 것이 그물망(네트워크)처럼 서로 연결된다.
이 연결의 방식이 무궁하기에 관계의 방식도 무궁하다. 이제 범주의 고정성이 시스템의 안정과 질서를 보장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범주의 고정성이 아니라 관계다. 관계의 논리에서는 기존에 서로 분리된 내용과 형식이 상호 의존하게 된다. 내용의 변화는 형식의 변화를 야기하고 반대로 형식의 변화도 내용의 변화를 야기한다. 서로에 대한 고려없이 각각의 것을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범주의 고정성과 내용과 형식의 이원론에 기반을 둔 기존의 논리에서 보면 규칙을 어기는 일탈로 간주된다. 그러나 새로운 네트워크 논리에서 보면 새로운 규칙을 필요로 하므로 기존의 질서에서 갖지 못한 기회와 선택을 제공하는 현상이 된다.
우리는 신경제와 네트워크를 거부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버리고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위기(危機)의 시기를 리스크(危)가 있는 찬스(機)의 시기로 보려는 에토스를 가지려고 한다. 변화에는 위험이 따르지만 변화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위험을 불러일으킨다. 변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며 역사의 대세다.
디지털 경제의 핵심은 두 가지다. 혁신(innovation)과 통합(convergence)이 그것이다.
신경제에서 혁신은 생존의 조건이자 전략이다. 정보기술의 발전 속도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다. 이러한 급변하는 기술적 조건은 이에 대한 대처의 태도와 전략에 따라 위험이 되기도 하고 기회가 되기도 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조건에 기민하게 대처하고 심지어는 이 변화를 주도하는 자와 기업만이 생존과 성공을 누리게 된다.
변화에 대한 대처와 주도는 디지털 경제에서만 타당한 것은 아니다. 비록 변화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린 굴뚝 경제의 시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포드가 자동차 회사를 만들었을 때 그 당시 번영을 구가하던 마차 회사들은 포드를 비웃었고 자동차라는 신기술을 무시했다. 그러나 이 회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을 닫거나 하청업체로 전락했다.
그들은 변화하는 기술적 조건을 무시하고 자신의 핵심역량(기술이나 제품)을 지나치게 고수 또는 과신했던 것이다. 변화의 와중에서도 진정한 중심점으로 견지해야 하는 것은 핵심이념이지 핵심기술은 아니다.
한 가지 핵심기술이나 분야를 고수한다는 것은 변화의 속도가 빠른 경제조건에서는 위험할 수도 있다. 휴렛패커드는 컴퓨터 제품을 만들기 이전에는 컴퓨터 산업에 전문성이 없었고 디즈니는 디즈니랜드를 만들기 전까지 놀이동산 사업과는 무관했으며 보잉이 처음으로 707기를 생산할 때도 상용항공기 사업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 또 IBM이 컴퓨터사업에 진출할 때도 전자산업에 대한 경험이 없었고 아멕스가 고속운송사업이라는 본업에만 전념했다면 포드 시대의 마차 회사들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돈 탭스콧에 따르면 신경제에서 지배적인 분야는 모든 부문에서 부를 창출하기 위해 구조적으로 3대 컨버전스 산업에 의해서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 구경제의 핵심영역은 자동차산업이지만 신경제에서는 컴퓨팅·통신·콘텐츠의 컨버전스 결과로 일어난 새로운 미디어산업이다. 다시 말해 컴퓨터 팀 비즈니스(하드웨어·소프트웨어·서비스)와 통신(전화·해외전보·위성 등) 및 콘텐츠(출판·오락·영화·광고 등) 사업들이 새로운 산업인 미디어산업을 창조하기 위해 집중되거나 합병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벤처기업이 신규사업을 위해 행하는 합병과 인수는 시스코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급변하는 기술적 조건과 컨버전스하는 신경제의 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전략이며 변화하는 시장에 대응하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주도권을 쥐기 위한 필연적 전략이다.
이러한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의 성장엔진이 바로 벤처다. 정보기술은 단순한 전산화나 기계화가 아니다. 전세계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인터넷은 대변혁의 원천으로 디지털 신경제를 이끄는 핵심 인프라다. 따라서 정보기술은 신경제와 신경영을 푸는 열쇠다.
이 정보기술을 리드하면서 산업화하는 기업은 기존 패러다임의 대기업이 아니라 신경제 패러다임을 선도하는 새로운 기업 즉 벤처기업이다. 지금 미국경제 호황의 길을 대표하는 기업인 시스코·인텔·마이크로소프트 등도 모두 벤처기업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한 때 IMF경제위기에 처했던 우리 경제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현 정부가 출범할 당시부터 이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으로 벤처기업에 초점을 맞추고 지원·육성한 것은 정보혁명의 변혁기에 지극히 타당한 올바른 방향이었다. 정부의 벤처산업에 대한 인식은 △벤처기업을 IMF경제위기 극복의 초석으로, 21세기 지식정보사회를 주도할 경제 주역으로 육성 △벤처기업 창업 및 투자 촉진으로 지식집약형 산업기반을 구축 △한국 벤처기업의 세계를 향한 성장기반을 조성하겠다는 올바른 국가전략의 바탕이 돼 왔다.
그런데 자본시장의 불안으로 인한 유동성 위기가 발생하여 코스닥의 지수가 폭락해 벤처거품론과 위기론이 등장하게 돼 자본시장의 불안을 더욱 크게 하는 악순환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혁명기는 늘 불안과 요동의 기복이 심한 시기였다. 하지만 혁명의 시대에서 변화의 물줄기는 심한 요동을 겪으면서도 실제로는 발전과 성장의 곡선을 그려왔다.
혁명기에서 기복이 심한 부침 곡선의 큰 방향은 상승을 향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경제처럼 불황에서 호황의 신경제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이 기복이 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강한 확신을 가지고 강력한 추진력으로 벤처산업에 대한 처음의 인식과 태도를 밀고 나가야 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보통신 혁명기의 큰 변화 물결을 제대로 읽고 우리나라의 사회경제 구조를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게 바꾸어 나가는 데 있어서 정부의 역할이 대단히 지대하다. 인류가 진화해온 역사는 도전과 모험을 통해 변화의 흐름을 적절하게 타왔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정부가 앞으로 나갈 큰 방향의 가닥을 잡고 세계 일류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 이 변혁기의 흐름을 정확하게 인식, 이 변혁기의 성장엔진인 벤처를 국가전략 차원에서 십분 활용한다면 이 위기의 시대는 기회의 시기로 전환될 것이다. 지금 위기의 시기는 다시 오기 어려운 절호의 찬스다. 우리는 벤처산업 육성을 통해 이 찬스를 살려서 우리 국가의 랭킹을 끌어올리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간혹 벤처기업에 핵심상품보다 핵심이념이 더 중요시돼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을 받는다. 우리는 흔히 「비전있는 기업이다」 「비전이 있는 기업이 유망하다」는 말을 하면서도 「비전」이 무엇인지를 꼭집어 설명하지 못한다.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제임스 콜린스 교수와 제리 포라스 교수는 1950년대 이전에 설립돼 여러 차례 제품 라이프사이클과 여러 세대의 최고 경영자를 맞았던 경험이 있는 기업을 「비전기업」으로 정의하고 있다.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보다는 훌륭한 조직을 우선시하고 이익의 극대화를 넘어선 핵심이념을 추구하며 경쟁기업에 승리하는 것보다 자기자신에게 이기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경영기법이 필요하다. 이런 핵심경영철학을 제대로 실천하는 기업이 바로 「비전기업」이라는 것이다.
지금처럼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들이 세계시장에 나가 기업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시기야말로 「비전」으로 대표되는 「핵심이념」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된다.
<정리 = 최정훈기자 jhchoi@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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