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 논설실장 hdlee@etnews.co.kr
우리가 시골에서 간혹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여름철 마을 동구밖 정자나무 그늘에서 동네 노인들이 부채질을 하며 장기나 바둑을 두는 장면이다. 가히 목가적인 풍경이다. 티없이 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무리를 지어간다면 그야말로 한 폭의 산수화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나 바둑판의 분위기는 꼭 목가적인 것만은 아니다. 아무리 친한 벗과의 대국이라도 한판 승부에는 양보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 뿐이다. 장기나 바둑판에는 예외없이 주변에 관전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중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훈수를 하는 사람이 꼭 나타난다. 당사자가 제대로 보지 못하는 수를 읽어 『그게 아니야』 또는 『그곳에 놓으면 죽어』하며 거들다가 다른 상대로부터 『가만히 있어』 『당신 저리가』 등의 핀잔을 당하기도 한다. 더욱이 다 이긴 판을 옆사람의 훈수로 역전패하면 감정이 격해진 쪽에서 큰소리가 나는 일도 없지 않다. 아무리 호인이라도 다 이긴 판을 훈수로 지면 평상심을 유지하기 힘든 법이다.
중국 송나라에 사홍미(謝弘微)라는 사람이 있었다. 학식이 뛰어나고 인품이 중후해 당대에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가 공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바둑으로 유유자적하며 지낼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친한 벗이 그를 찾아와 바둑을 두게 되었다. 사홍미보다 수가 아래였는지 대마가 다 죽게 됐는데도 그 친구는 이를 알지 못하고 엉뚱한 자리에 돌을 놓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서 관전하던 사람이 너무 답답해 훈수를 했다. 그렇다고 『대마가 죽게 생겼군』하고 직접 훈수를 하자니 사홍미가 싫어할 것 같아 내심 궁리 끝에 시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서남풍이 몰아치니 일엽편주가 위태롭구나.』 이 말을 들은 사홍미의 친구가 판세를 다시 살펴 보니 자신의 대마가 죽기 일보직전이 아닌가. 이에 한수를 적소에 두어 결국은 이 판에서 역전승을 거두고 말았다. 다 이긴 바둑을 훈수로 지게 된 사홍미는 순식간에 안색이 변했다. 평상시 봄날씨처럼 온화한 성격의 사홍미는 『이 판은 자네가 책임지게』하며 바둑판을 뒤엎고 말았다고 한다. 사기에 전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장기나 바둑판에서 두는 사람과 관전자의 차이는 주관적이냐 아니면 객관적이냐 하는 점이다. 당사자는 오직 이기겠다는 생각에 냉정을 잃기 쉽다. 승패가 걸려 있어 언제나 자기 위주로 판단한다. 하지만 관전자는 승패와 무관해 냉정하게 판세를 읽을 수 있다. 자연히 차분하게 상대의 수를 분석할 수 있다. 그렇다고 훈수를 잘하는 사람이 장기나 바둑판에 앉으면 승리자가 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그 역시 입장이 바뀌면 주관적으로 판세를 분석하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경제의 미래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시장에서는 경제위기론까지 나돌고 있다. 지난 4월까지 우리의 무역수지 흑자규모는 지난해 같은 기간의 10% 수준인 7억7000만달러에 불과하다고 한다. 회환위기를 몰고 왔던 단기외채 비중은 30%대로 높아졌고 각종 소비재 수입은 늘어나고 있다. 휴대폰 20억달러 수출에 15억달러 어치의 부품을 수입해야 하는 산업구조라면 예삿일이 아니다. 그뿐이 아니다. 유가불안과 금리·환율·물가·금융권구조조정·노사문제·기업구조개선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근 무디스사는 한국의 구조개선은 형식적이고 금융불안을 방치하면 위기가 재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형태는 다르지만 일종의 훈수인 셈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잘못한다고 지적하면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지적이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귀담아 들어야 할 점이 있다.
채근담에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몸에 이롭고 충고는 귀에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다』는 말이 있다. 남의 쓴소리도 가려 들으면 보약이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훈수를 듣지 않게 모든 일을 원칙대로 명확하게 처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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