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전쟁
정부가 「물가안정과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독과점 품목들에 대한 가격통제를 제도화한 것은 76년 3월부터였다. 이 법률의 적용대상 가운데 하나가 TV·냉장고·라디오·카세트·음향기기·선풍기·세탁기·에어컨·전기밥솥 등을 포함하는 가전분야였다. 당시 가전업계는 맏형격인 금성사를 위시해 삼성전자·대한전선·동남전기·한국테레비·아남산업 등이 이끌어가고 있었다. 이 가운데 금성은 선발기업이라는 프리미엄, 밀도 높았던 대정부 로비력, 그리고 대자본이라는 3박자를 골고루 갖추고 거의 전품목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고수함으로써 사실상 업계를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물가안정과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발효와 함께 정부는 시장점유율을 토대로 주요 공산품 제조업체들의 독과점 여부를 판정했다. 1∼3개사 제품의 시장점유율 합계가 나머지 업체들의 그것에 비해 현격하게 높을 경우 독과점업체로 지정됐다. 독과점 판정을 받으면 해당업체들은 반드시 가격결정 과정에서 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가전분야에서는 금성사·대한전선·삼성전자 등 3사가 독과점업체로 판정이 났다. 금성사는 주력제품이던 TV·냉장고·세탁기 외에 에어컨·선풍기·전기밥솥·믹서·음향기기 등 거의 모든 품목에서 독과점업체로 판정을 받았다. 대한전선은 냉장고와 세탁기에서, 삼성전자는 TV와 냉장고에서 각각 독과점업체로 지정됐다.
참고로 77년께 가전분야의 품목별 독과점 비율을 보면 TV는 68.6%(금성사 36.4%, 삼성전자 32.2%), 냉장고는 74.9%(금성사 36.6%, 삼성전자 22.2%, 대한전선 16.1%)로 나타났다. 세탁기 역시 72.1%(금성사 42.7%, 대한전선 29.4%)나 됐다. 이밖에 라디오는 48.8%(금성사)로 나타났다.
독과점 비율은 시간이 갈수록 높아져 정부가 골머리를 앓았다. 그것에 비례해서 3사간의 점유율 경쟁 역시 갈수록 치열해졌다. 정부가 「물가안정과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의 제정과 독과점 품목 판정제도를 도입한 배경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정부는 때마침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행을 앞두고 경제규모의 급팽창에 따른 기업간 과열경쟁을 우려하고 있었다.
점유율 경쟁의 정점은 역시 가전산업의 대표격인 TV부문이었고 그 주역은 금성과 삼성이었다. TV는 두 회사 모두 기업을 대표하는 주력상품이자 전체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가장 높은 품목이었다. 잠시 두 회사의 70년대 TV사업 개황을 알아보기로 하자.
금성의 경우 70년대 발표한 TV모델 수는 모두 111종이나 됐다. 이 가운데 78년과 79년 2년동안에만 30종, 79년에 24종을 개발하는 등 2년동안 출하 모델 수의 50% 가량이 집중됐다. 당시 경제규모나 시장상황을 볼 때는 결코 적지 않은 숫자였다.
선발인 금성은 66년 최초의 국산 진공관TV 「VD191」을 생산한 이후 70년 트랜지스터TV 「VS66S」를 발표했고 74년에는 집적회로를 채택한 「VS66IC」의 개발에 성공했다. 금성의 주요 기술제휴선은 일본 히타치였다. 맹추격해오는 삼성과 달리 브라운관 생산기술과 시설을 갖지 못했던 금성은 74년 히타치로부터 브라운관 제조기술과 제조설비 도입계약을 맺고 78년까지 연산 100만개씩 생산하는 시설을 갖추게 됐다.
수출과 내수를 포함한 총생산규모는 70년 5만2970대이던 것이 8년 뒤인 78년 118만대로 껑충 뛰었다. 78년 금성사의 매출액은 1700억원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TV 매출이 600억원이었다.
삼성전자가 TV사업에 진출한 것은 회사가 갓 출범한 69년이었다. 이때 삼성은 오리온전기와 총판계약을 체결하고 19인치 진공관TV 「프린스 코로넷」을 위탁생산해 3270대를 판매했다.
73년 삼성은 미쓰비시의 기술지원으로 첫 자체 모델인 진공관식 「SWV310」을 개발했고 같은 해 4월 트랜지스터식 19인치형 「SWT506L」을 발표했다. 금성에 비해 진공관식은 7년, 트랜지스터식은 4년이 각각 늦은 것이었다. 이 가운데 「마하」라는 상품명이 붙은 「SWT506L」은 막 조성된 TV수상기 보급 확대 붐을 타고 시중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마하」의 성공은 금성에 눌려 있던 삼성전자에 큰 자신감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됐다.
70년부터 74년까지 삼성이 출하한 TV모델은 모두 48종이나 됐다. 이 시기만 놓고 보면 오히려 금성을 앞지르는 수준이었다. 삼성전관과 삼성코닝 등 부품계열사를 둔 것은 삼성전자에 큰 힘이었다. 삼성은 78년 총생산량이 100만대를 돌파, 1위인 금성을 바짝 쫓기 시작했다.
삼성이 「마하」의 성공에 고무돼 75년 4월에 발표한 신 모델이 바로 「이코노」였다. 「이코노」의 최대 장점은 순간수상방식(Quick Start)기술로 전원을 넣으면 곧바로 화면이 떠오르게 했다는 점이었다. 이는 74년 삼성전관이 순간수상방식을 지원하는 브라운관의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었다.
이제까지의 TV들이 전원을 넣고도 상당시간 브라운관을 예열해야 했던 점에 비하면 엄청난 기술적 진보였다. 예열시간을 없앰으로써 TV수상기의 수명은 2.5배로 연장됐고 하루 5시간 시청을 기준으로 할 때 20%의 절전효과까지 가져올 수 있었다. 절전효과는 74년의 제1차 오일쇼크와 맞물려 소비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삼성은 이 기술이 세계에서 3번째며 한국에서 첫번째라는 헤드카피 아래 「예열불요」 「절전 20%」 「수명연장」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대대적인 광고공세를 폈다. 「이코노」는 78년 말 내수시장점유율 40.1%를 기록, 34.2%의 금성을 누르고 마침내 1위를 쟁취했다. 흑백TV 내수시장을 놓고 벌인 금성과 삼성의 전쟁은 곧바로 수출용 컬러TV 개발기술 경쟁으로 이어졌다.
국내에서 컬러TV를 처음 생산한 회사는 아남산업과 일본나쇼날전기가 합작 설립한 한국나쇼날이었다. 한국나쇼날은 74년부터 76년까지 일본나쇼날에서 부품을 들여와 모두 2만9000여대의 컬러TV를 생산했으나 국내에서는 컬러TV 방송이 방영되지 않아 전량 수출했다. 내수를 전제로 하지 않는 제품의 생산과 수출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한국나쇼날에 이어 한국크라운전자에서도 컬러TV 조립생산에 나섰으나 역시 한계에 부딪쳐 76년 생산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74년 9월 대자본을 바탕으로 한 금성사가 미국 RCA와 기술제휴로 컬러TV의 개발에 나섰다. 1년 뒤인 75년 8월 삼성전자도 RCA와 기술제휴계약을 맺고 컬러TV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금성이 RCA와 특허권 문제로 시간을 끄는 사이, 76년 6월 삼성전자가 먼저 14인치형 컬러TV 시제품 개발을 완료하고 77년 4월부터 양산에 나섰다. 삼성은 이때 기존 흑백TV 라인 1개를 컬러TV 라인으로 전용해 첫 생산분 300대를 파나마에 수출하며 기세를 올리기도 했다.
금성이 컬러TV의 양산에 돌입한 것은 삼성보다 오히려 5달이나 늦은 77년 9월부터였다. 삼성으로서는 비록 TV 한 분야였지만 창업 8년만에 18년차의 업계 왕고참 기업을 따라잡은 것이었다. 컬러TV 개발 주도권은 곧바로 이듬해 흑백TV 내수시장 1위 쟁취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TV분야에서 금성사와 삼성전자의 대결 제3라운드는 컬러TV 방영시기를 놓고 벌어졌다. 내수시장과 수출용 컬러TV에서 후발 삼성에 따라잡힌 금성은 광고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는 등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총력전에 나섰다. 이에 뒤질세라 삼성도 엄청난 물량의 광고를 쏟아냈다. 당시 한국전자공업진흥회장을 맡았던 김완희는 이같은 상황을 두고 『두 회사의 광고전쟁으로 어부지리를 얻은 것은 광고비 수입이 늘어난 언론사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즈음 미국정부가 한국업체들의 일방적인 대미 컬러TV 수출 문제를 들고 나섰다. 한국에서는 시판하지 않는 제품을 왜 남의 나라에 밀어내느냐는 것이었다. 광활한 미국시장을 겨냥하며 시설투자를 확대하던 국내 컬러TV업체들에는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업계에서 제기한 의견이 컬러TV방송의 조기방영 의견이었다. 업계는 한국전자공업진흥회의 이름으로 컬러TV의 방영은 수출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탄탄한 내수시장을 형성함으로써 전자산업계의 발전에도 큰 보탬이 된다는 의견을 요로에 개진했다.
그러나 수출과 관련한 업계의 의견은 다 들어주던 박정희 대통령이 컬러TV의 방영만큼은 안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흑백TV도 못 보는 사람이 태반인데 컬러TV방송을 방영하면 계층간 위화감만 커진다는 것이었다. 업계의 의견을 청와대에 전달할 의무가 있었던 상공부도 대통령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렇잖아도 상공부는 업계의견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대통령에게 컬러TV의 조기방영계획을 보고했다가 묵살당한 일이 있었다. 당시 상공부의 건의에 대해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업계의 일치된 의견이라니요? 국내실정을 보아 컬러TV의 방영은 시기상조라고 건의한 업체가 있어요. 그것도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가장 큰 기업이 말이오.』
미국의 통상압력문제를 해결하고 전자산업 확대발전에 큰 역할이 기대됐던 컬러TV방송의 방영은 결국 5공화국에서 이뤄졌다. 금성과 삼성의 3라운드 대결에 대한 결과도 그래서 자연스럽게 80년대 이후로 늦춰졌다.
많이 본 뉴스
-
1
'대세는 슬림' 삼성, 폴드7도 얇게 만든다
-
2
삼성·SK 하이닉스 '모바일 HBM' 패키징 격돌
-
3
[ET톡] 퓨리오사AI와 韓 시스템 반도체
-
4
자체 모델·오픈소스·MS 협력…KT, AI 3트랙 전략 가동
-
5
마이크론 공략 통했다…펨트론, 모듈 검사기 공급
-
6
트럼프, 푸틴과 만남 “매우 곧”..EU 보복관세 계획엔 “그들만 다칠 뿐”
-
7
“브로드컴, 인텔 반도체 설계 사업 인수 검토”
-
8
머스크, 챗GPT 대항마 '그록3' 17일 첫선
-
9
천안시, 총 인구수 70만 달성 코앞…작년 7000여명 증가 5년 만에 최대 유입
-
10
속보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여야 합의로 산자위 소위서 가결
브랜드 뉴스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