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창간17주년> "디지털 세상"이 열린다

 바빌론의 신관이자 역사가인 베로수스는 먼 옛날에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말을 사용했다고 쓰고 있다. 서로 같은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통역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 생활방식도 비슷비슷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늘까지 닿는 높은 탑을 거의 완성할 무렵 문제가 생겼다. 이 탑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자 한 사람의 지도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사람들은 서로 다른 문화와 말, 생활방식을 가지고 각자 다르게 살아야 했다. 유명한 「바벨탑」의 이야기다.

 그러나 새 천년을 바로 눈앞에 둔 지금, 사람들은 다시 바벨탑 이전의 생활을 향유하고 있다. 전세계의 사람들은 「비트」란 언어를 공유하고 「사이버 공간」의 시민으로서 국경과 인종을 넘어선 연대감을 느낀다. 피부색이 다르고 서로 다른 언어를 쓰더라도 가상공간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하며 서로 친해질 수 있고 다른 나라에서 유행하는 음악도 인터넷을 통해 쉽게 전송받을 수 있다. 가상공간의 단체에 가입하거나 시위를 벌이기까지 한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없어지면서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바로 디지털 기술을 통해 광속으로 온 세계에 퍼진다. 미국 대통령의 스캔들을 담은 보고서는 단 몇 분만에 아프리카 최남단의 남아공화국이나 뉴질랜드 오지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전달되고 미국 실리콘밸리의 시스템 설계사와 인도의 프로그래머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아무런 불편 없이 한 팀으로 일을 한다.

 한때 구호로만 여겨졌던 「지구촌」이란 말도 이제는 더 이상 특별한 단어가 아니다. 사람들은 기자들마저 철수한 보스니아의 전쟁터에서도 인터넷을 통해 생생한 현장의 보고를 접할 수 있고 촘촘하게 연결된 금융전산망 덕분에 아시아의 화폐가 하락한 지 불과 몇 분만에 미국의 증권지수가 춤을 추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늘에 닿는 높은 탑을 쌓겠다던 인간의 욕망은 이제 우주 식민지 개척과 나노로봇으로 바뀌었다. 이제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한 우주와 미세 현미경으로나 겨우 볼 수 있는 초소형 나노의 세계로 관심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화성에 도착한 패스파인더호가 보낸 정보가 불과 4∼5분이면 8000만㎞를 날아 지구에 닿는다. 또 이 내용은 즉시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에 생중계된다.

 이처럼 정보와 통신기술을 이용해 우리생활의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주인공이 바로 디지털 기술이다. 「0」과 「1」이란 숫자의 단순한 조합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책이나 영화, 음반 등 한가지 형태로만 만들어져 유통되던 정보는 이제 디지털 정보로 바뀌면서 다양한 가공과 변신을 거쳐 지식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가고 있다. 이용자들이 직접 줄거리를 만들어 가는 멀티스토리 소설책이 탄생하고 영화와 게임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가상현실 기술의 발전은 영화 「토탈 리콜」이나 「매트릭스」의 이야기가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예고하고 있다. 인터넷 역시 이제 더 이상 문자 정보나 검색하는 밋밋한 공간이 아니다. 머라이어 캐리의 공연을 보며 그녀의 힘찬 음악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컴퓨터가 TV와 VCR의 역할을 대신하는가 하면 인터넷폰을 통해 웹페이지의 정보를 탐색하며 상담원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디지털은 단순한 기능의 조합으로 인간을 편리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정보를 접하는 방식과 속도까지 바꿔놓고 있다. 디지털로 저장된 정보는 한결 쉽게 가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에 실어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치만 있다면 어떤 콘텐츠건 TV와 라디오를 통해 전송하는 것은 물론 웹페이지, 전자우편, 음성파일 등 다양한 형태로 저장할 수 있다.

 디지털 정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유통되는 것이 아니다. 비트가 전자제품과 컴퓨터, 사람과 컴퓨터 사이에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뿐만 아니라 TV와 오디오, 전기밥솥, 에어컨 등 모든 전자제품 기기들은 각자 자신들이 가진 정보를 교환하고 이를 통해 더 「똑똑한」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 집안의 가전제품들은 홈네트워크를 통해 수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밖에 있는 주인과 언제라도 통신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최근 속속 개발되고 있는 정보가전은 이같은 똑똑한 전자제품의 1세대라고 할 만하다.

 이같은 디지털 사회는 컴퓨터와 통신 기술의 발전이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 「CPU에 내장된 칩의 밀도는 2년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이 맨 처음 발표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회의적인 시각을 표시했지만 오늘날 기술의 발전은 이 법칙이 오히려 보수적인 전망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머지않아 수십 기가의 메모리에 테라바이트의 하드디스크가 보편화되고 지금의 수백배에 달하는 대용량 정보가 통신망을 통해 유통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우리는 지금 기존의 모든 것이 바뀌는 디지털 혁명의 한 가운데에 서 있다. 이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화석 속의 「공룡」으로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개인이든 기업이든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국가조차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새 천년을 눈앞에 둔 지금 디지털에 주목하는 이유다.

<장윤옥기자 yoj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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