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밀레니엄 리더 (7)

챨스 왕 컴퓨터 어소시에이츠 회장

 때로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꾸며낸 일처럼 들린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상상보다 더 믿기 어려울 수도 있다. 실리콘밸리에는 IT업계 거인들에 대해 떠도는 전설들이 많다. 컴퓨터 어소시에이츠(CA)사 찰스 왕 회장(55)의 성공담도 그 중 하나다.

 찰스 왕은 44년 상하이 태생이다. 그는 8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어린 시절은 가난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쿨리(Coolie:중국에서 건너온 저임금 노동자) 출신이 아니었다.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후 상하이로 돌아가 대법원 판사까지 지낸 최상류층이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도망치듯 중국대륙을 떠나 공산당 지부가 있는 뉴욕 퀸스로 와야 했다.

 부유한 어린시절과 달리 미국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우체국에서 우편물을 분류하는 일을 하면서 어렵게 학교를 마쳤다. 고등학교 은사들은 그를 전혀 두드러진 데가 없었던 학생이라고 기억한다. 하버드나 스탠퍼드 대신 퀸스 칼리지를 택한 왕 회장의 평균 학점은 2.2로 우등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학시절에도 사업가의 기질은 보이지 않았다.

 67년 퀸스를 졸업한 왕 회장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한동안 방황했다. 그러던 어느날 프로그래머 구인광고를 보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프로그래머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한다. 『그게 도대체 뭐하는 거냐』고 어머니가 묻자 그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프로그래머가 되면 일자리가 있대요』라고 대답했다. 사실 그때까지 찰스 왕은 컴퓨터를 구경해 보지도 못했다.

 수학을 전공한 찰스 왕은 프로그램에 매달렸다. 잠은 서너 시간만 잤다. 틈틈이 중고차를 팔기도 하면서 책과 씨름한 끝에 마침내 그는 전산 컨설턴트가 될 수 있었다. 사무실을 빌릴 돈이 없었던 찰스 왕은 컨설팅을 해주고 돈 대신 컴퓨터와 작업공간을 빌려 일을 했다. 안내 데스크를 봐주기도 하고 청소와 카펫 까는 작업도 대신 해줬다.

 76년 CA­SORT라는 소프트웨어에 CA의 상표를 붙일 수 있게 된 찰스 왕 회장은 IBM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쓰는 회사에 이 제품을 팔기 위해 뛰어다녔다. 그 해 수입은 5000달러였다. 그리고 오늘날 CA사는 마이크로소프트·오라클에 이어 세계 3위의 소프트웨어업체가 됐다. 지난해 순수익은 오라클보다 오히려 많았다.

 찰스 왕은 메인프레임 시대에서 클라이언트 서버 시대로의 급격한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소프트웨어 제국을 지켜왔다. CSC사 간부들에게 뇌물을 줘 유리한 협상을 하려 했다는 구설수에 오른 것을 제외하면 그는 기업의 인수합병에도 탁월한 안목을 보여줬다. 기술컨설팅회사 리얼로직을 비롯, CA의 약점을 보완해 줄 벤처업체들을 시기적절하게 사들여 경쟁력을 높였다.

 이제 그는 중국계 소프트웨어의 황제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유리로 둘러싸인 빌딩의 꼭대기 층에서 나무랄 데 없이 가꾸어진 잔디를 내려다보는 찰스 왕 회장에게선 어딘가 독재자 같은 분위기도 느껴진다. 사실 그는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직원들을 무섭게 힐책하는 상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찰스 왕 회장은 다른 어떤 CEO보다 너그러운 사회사업가로 유명하다. 그는 특히 아시아계 청년실업가를 돕고 중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아시아 아메리칸 문화센터 건립을 위해 거금을 내놓고 스토니 브룩에 있는 뉴욕주립대학에 창업 인큐베이터를 세워주기도 했다. 중국 본토의 장애 어린이 돕기 모금에도 헌신적이다. CA의 홈페이지에 「사람들을 돕기」라는 코너가 있을 정도.

 찰스 왕이라는 이름은 이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중국 이민자들의 우상이다.

<이선기기자 sk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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