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멘스와 교환기 국산화
1959년을 전후해서 라디오 중심의 전자산업과 쌍벽을 이뤘던 것이 전기통신분야다. 산업으로서 전자와 전기통신은 1970년대 후반 전자교환기(ESS)가 도입돼 전자통신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형성될 때까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거의 무관하게 태동해서 성장했다. 이때까지 교환기나 전화기 등 대다수 통신기기들의 메커니즘은 기계식이었다.
우연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전기통신분야에서 진공관 라디오가 처음 생산된 1959년을 전후해서 여러 가지 기록에 남을 만한 일들이 벌어졌다. 통신기기 가운데 제일 먼저 국산화나 대량생산과 같은 산업적인 움직임이 태동한 분야는 자동교환기 쪽이었다. 이 시점에서 자동교환기는 전기통신분야 발전의 단초이자 산업의 몸통 그 자체였다.
1950년대 후반까지 우리나라 전화국에서 사용되던 자동교환기는 일본전기(NEC) 등 일본 기업들이 생산·공급하던 스트로저(Strowger)식이 대부분이었다. 서독 기업들의 EMD(Edelmetal Motor Drehwhler)식과 스웨덴 및 미국 기업들이 생산한 크로스바(XBar)식 교환기가 일부 도입되기도 했으나 그 비율은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적은 것이었다.
스트로저식은 전화가입자의 발신 다이얼 펄스에 의해 단단(端端, Step by Step)스위치를 수평·수직으로 이동하여 연결시키는 직접제어방식으로서 그 원형이 이미 1887년 미국에서 완성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때인 1935년 경성전화국에 처음 도입된 이래 1950년대 말까지 국설(局設)용 자동교환기의 대명사로 통하기도 했다. 이 방식의 교환기는 제어회로가 간단하지만 사용능률이 낮고 접속속도(동작시간)가 느리며 고장발생률이 높다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 가입자 회로에 잠금장치(Line Lock Out)가 없어 안전성 문제도 없지 않았다.
EMD식은 스트로저식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접점스위치에 귀금속을 사용한 것으로서 1955년 지멘스 할스케(Siemens Halske)사가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꾸준히 성능을 발전시켜 왔다. EMD식은 단방향의 회전(Rotary)스위치만으로 구성돼 있어 단단스위치를 사용하는 스트로저식보다 접속속도가 빨랐다. 또한 가입자의 다이얼 펄스에 의한 직접제어방식과 펄스정보를 축적한 후 접속조작을 하는 간접제어방식 등 두가지 종류가 있어 유연성과 확장성이 뛰어났다.
역시 스트로저식의 단점을 개선한 크로스바식은 수평과 수직으로 교차되는 단단스위치의 접점에 릴레이(Relay)를 두어 스위치 접속과 절단 동작을 동시에 제어할 수 있는 것이 기술의 핵심이었다. 문제는 이 방식의 교환기가 정확성과 안전성이 높다는 장점과 달리 속도가 느리고 외형을 줄이는 데 한계가 있어 국내에서는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크로스바식에서 처음 적용된 공통제어 기술개념은 197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전자교환기 구조의 기초가 됐다.
스트로저식 일색이던 우리나라에 EMD식 교환기가 대거 도입된 것은 1959년 정부가 실시했던 국제 교환기 입찰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 입찰은 미국의 국제협력국(ICA)이 제공한 전쟁복구지원금 150만달러로 치러졌는데 그 규모는 이때까지 우리나라에 설치돼 있던 자동교환기 용량의 절반 가량인 1만5000회선이나 됐다. 이 국제입찰에는 일본에서 NEC 등 3개사가 스트로저식, 스웨덴의 에릭슨과 미국의 ITT 등 5개사가 크로스바식 그리고 서독의 지멘스 할스케사가 EMD식을 각각 제안하는 등 4개국 9개사가 참여했다.
당시 자유당(自由黨) 정부는 국토가 비좁기 때문에 단일 교환방식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국제입찰에서 낙찰되는 방식의 기종을 우리나라 표준으로 삼기로 했다. 응찰결과 회선당 88.39달러의 지멘스 EMD식이 75.16달러의 NEC 스트로저식을 누르고 국설용 표준교환기로 선정됐다. 가격경쟁력에서 밀렸음에도 불구하고 EMD가 낙찰된 것은 이 방식의 기종이 가격대비 성능면에서 가장 앞섰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표면상의 이유였을 뿐 사실은 이승만(李承晩)정권의 대일(對日)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 주요 요인이었다.
지멘스는 이 입찰을 계기로 EMD식 교환기를 통해 한국 통신기기 시장에서 탄탄한 기반을 갖추게 됐다. 1960년 한국정부가 미국 개발융자기금(DLF, 1961년 ICA 등과 합병돼 AID가 됐음)으로부터 들여온 350만달러 규모의 차관이 모두 EMD교환기 추가 구매비용으로 사용된 적도 있었다.
지멘스의 EMD식 교환기가 표준 국설교환기로 선정됨에 따라 관련업체들의 이해관계가 크게 엇갈렸다. 우선 1960년을 전후해서 전기통신 업계현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당시의 전기통신산업은 크게 통신기기·선로시설·전기기기·통신공사업 등 네 분야로 나뉘어 있었는데 전기통신산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통신기기 및 전선제조 분야의 경우 통틀어 10개사 내외였다.
우선 통신기기분야에는 전화기·교환기·교환기부품·반송장비 등을 종합적으로 생산 공급한 동양정밀(東洋精密·OPC)과 한국통신기공업 그리고 금성사 등을 비롯 중소기업인 미광공업(美光工業)·풍성전기(豊星電機) 등이 있었다. 선로시설 가운데 전선(케이블)부문에는 대한전선(大韓電線)과 국제전선(國際電線) 등이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전주(電柱)·애자(碍子) 등 기타자재 분야 생산은 아주공영(亞洲共榮)·국제기업(國際企業)·금호(錦湖)·중앙산업(中央産業) 등이 주도했다. 전동기·축전지·정류기 등 통신설비용 전기기기분야에는 진해축전지제작소(鎭海蓄電池製作所)·항신축전기(恒信蓄電器)·한국전지(韓國電池)·동아전기(東亞電氣)·이화공업(二和工業)·풍성전기 등이 있었다. 통신공사업은 토목·건설회사들이 주축이 돼 결성된 전신전화공사협회(한국전기통신공사협회 전신)가 주도했는데 이 단체는 1970년대 이후 베트남과 중동지역 건설 붐을 일으키는 데도 큰 몫을 담당하게 된다.
EMD식 교환기의 낙찰로 희비가 엇갈린 곳은 OPC·한국통신기공업·금성사 등 통신기기 3사였다. 1950년대 말까지 통신기기분야는 1953년 스트로저식 교환기용 부품 공급업체로 출범한 OPC와 해방 이후부터 외제 전화기 등을 독점 공급해온 한국통신기공업 등 2사 체제가 주도했는데 1961년 7월 신생기업인 금성사가 「금성1호」 전화기를 발표하면서 3사 체제로 개편이 됐다.(국산전화기 개발은 다음호에 소개한다)
EMD식이 국설(局設)자동교환기 시장을 장악하게 되자 당장 OPC가 된서리를 맞았다. OPC는 이제까지 NEC의 스트로저식 교환기 유지보수를 비롯, 수리에 필요한 부품과 일부 유닛들을 직접 생산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OPC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스트로저식 교환기를 국산화하겠다는 목표로 자체 기술축적에 매진했다. OPC가 겨냥한 곳은 전화기 보급확대로 급신장이 예상되던 사설자동교환기(私設, PABX) 쪽이었다. 마침내 OPC는 1962년 NEC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100회선용 스트로저식 PABX의 독자생산에 성공했다. 이 국산1호 PABX는 그해 10월 김포공항에 설치됐다. 이를 계기로 OPC의 국산 스트로저식 교환기는 초창기 PABX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고 나중에는 국설 분야에도 진출할 수 있게 됐다. 1977년 ITT식 전자교환기(ESS)가 도입될 때까지 우리나라 기계식 교환기 시장은 OPC의 스트로저식과 나중에 금성사가 국내 생산하게 된 EMD식이 양분했다.
통신기기 3사 가운데 최고의 성장세를 구가한 곳은 금성사였다. 금성사는 스트로저식 교환기 국산화에 성공한 OPC에 자극을 받고 자사에 호의적이던 국가재건최고회의 관계자들을 움직이는 한편 지멘스측과 직접 접촉을 통해 EMD식 교환기의 국내 생산을 시도했다. 마침내 금성사는 1962년 12월 정부의 국설용 교환기 납품회사인 지멘스 할스케사와 기술계약을 체결하고 1964년부터 국내에 공급할 EMD식 교환기의 생산에 합의했다. 이어 1964년 6월 금성사는 지멘스측과 기술도입 및 350만마르크 규모의 차관도입계약을 맺었으며 그해 11월 국산화 25% 수준의 5000회선 규모의 교환기를 생산하여 인천전화국에 납품했다.
외제전화기 수입과 함께 자석식 및 공전식 교환기를 생산해온 한국통신기공업은 앞서 제휴를 모색했던 NEC와 지멘스가 각각 OPC와 금성사를 파트너로 정하자 미국 ITT사와 손잡고 크로스바식 교환기 국내 생산을 시도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마저 체신부의 반대에 부딪쳐 한국통신기공업은 자동교환기 생산을 포기하고 전화기와 반송장비 등의 생산에 전념하게 됐다. EMD식 교환기는 결국 이때까지 통신기기분야에서 기업 규모가 가장 컸던 한국통신기공업의 침체와 동시에 후발인 OPC와 금성사를 부각시킨 역할까지 수행한 셈이었다.
3사 외에 자동교환기분야에 대한 진출에 큰 관심을 보였던 곳은 나동선(裸銅線)·연피(鉛皮)케이블·PVC통신케이블 등 전선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둔 대한전선이었다. 대한전선은 1960년대 중반부터 신규 유망분야라고 판단한 기계식 자동교환기 생산에 참여키로 하고 시흥에 대단위 생산라인까지 구축해 놓고 한국통신기공업과의 관계가 무산된 ITT측과 기술제휴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때는 벌써 선발업체인 OPC와 금성사가 스트로저식 및 EMD식 교환기의 대량생산에 돌입하기 일보직전인 상황이었다. 결국 더 이상의 기계식 자동교환기 생산이 필요하지 않다고 스스로 판단한 대한전선은 ITT와의 교섭을 중단하고 시흥공장을 TV와 냉장고 등의 생산체제로 전환하고 이를 계기로 가전사업 진출을 정식 선언하게 됐다.
<서현진 기자>
많이 본 뉴스
-
1
켐트로닉스, 반도체 유리기판·웨이퍼 재생 시동…“인수한 제이쓰리와 시너지 창출”
-
2
'대세는 슬림' 삼성, 폴드7도 얇게 만든다
-
3
“美 트럼프 행정부, TSMC에 '인텔과 협업' 압박”
-
4
온순한 혹등고래가 사람을 통째로 삼킨 사연 [숏폼]
-
5
"불쾌하거나 불편하거나"...日 동물원, 남자 혼자 입장 금지한 까닭
-
6
트럼프 취임 후 첫 한미 장관급 회담..韓은 관세·美는 조선·에너지 협력 요청
-
7
삼성·SK 하이닉스 '모바일 HBM' 패키징 격돌
-
8
바이오헬스 인재 양성 요람…바이오판 '반도체 아카데미' 문 연다
-
9
아모레퍼시픽, 'CES 화제' 뷰티 기기 내달 출시…“신제품 출시·글로벌 판매 채널 확대”
-
10
“시조새보다 2000만년 빨라”… 中서 쥐라기시대 화석 발견
브랜드 뉴스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