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사 출범과 국산 라디오
1950년대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사회를 휩쓸던 실존주의(實存主義) 사조(思潮)가 뒤늦게 한국에 상륙한 시기였다. 전쟁이 할퀴고 간 암울한 상처들의 회복은 더디었다. 모든 것이 귀했기 때문에 전쟁 이전으로 복구하기보다는 호구지책이 더 급했다.
전기통신 시설의 80%가 파괴된 한국전쟁의 흔적은 결국 1957년 말경에 가서야 원상복귀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정부의 의지와 유엔한국부흥위원회(UNKRA)와 같은 외국기관들의 원조가 큰 몫을 했다. 비로소 사람들은 새로운 출발에 대한 희망을 불태우기 시작했고 아울러 여러 산업분야가 중흥되거나 태동함을 알렸다.
전후 복구가 막바지에 이른 1957년 초봄 어느 날 락희화학공업사(樂喜化學工業社) 사장 구인회(具仁會)는 서울사무소 기획부장 윤욱현(尹煜鉉, 금성사 전무·금성통신 사장 역임)을 불러 시대상황에 맞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해 보도록 지시했다. 1947년 부산 부전동에서 화장품 제조로 출범한 락희화학은 플라스틱 제조분야로 사업을 확장, 10년 만에 국내 플라스틱 제품 수요의 70%를 장악했을 만큼 고속성장중이었다.
특히 칫솔과 플라스틱 그릇 등은 생산되기가 무섭게 팔려나가 이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미국산 플라스틱 사출성형기는 「돈 찍는 기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신이 난 구인회는 1953년에 락희산업(반도상사의 전신, 현 LG상사)과 1957년 금성합성수지공업사(金星合成樹脂工業社) 등 계열사를 잇따라 설립, 사업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플라스틱에 이어 1955년부터 생산된 「럭키치약」까지 성공을 거두자 구인회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사업분야로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구인회의 지시에 따라 윤욱현은 곧장 라디오를 국산화해 보자는 내용의 건의서를 올렸다. 영어에 능통하고 전축에 관심이 많았던 윤욱현은 평소 전기전자 관련 외국서적들을 자주 읽고 있어서 라디오 국산화 제안은 그가 평소부터 줄곧 생각해 오던 것이기도 했다. 이에 앞서 구인회는 관공서 업무를 담당하는 서울사무소 최영용(崔英容, 금성사 전무 역임)으로부터 일본통산성의 경제백서(經濟白書)에 석유화학과 함께 전자공업이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큰 유망분야로 적시돼 있음을 이미 보고받아 윤욱현의 제안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라디오 국산화를 놓고 락희화학 내부의 반대의견은 만만치 않았다.
국내에 라디오생산업체가 한 곳도 없을 뿐더러 미군PX를 통해 산뜻한 외제 라디오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었다. 아무런 경험도 없고 결과까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겠느냐는 얘기였다. 여기에 윤욱현 등 찬성론자들은 라디오 케이스가 플라스틱제이기 때문에 자체 기술로 감당할 부분이 적지 않으며 핵심부분은 외국기술을 유치하면 된다고 맞섰다.
최종 결정은 사주인 구인회가 내렸다. 라디오사업 검토 1년여 만인 1958년 1월 구인회는 철회(哲會)·정회(貞會)·태회(泰會)·평회(平會)·두회(斗會) 등 형제들과 장남 자경(滋暻, 당시 락희화학 상무, 34세)을 불러모아 다음과 같은 요지의 결단을 내렸다.
『우리가 언제까지 미제 PX물건만 사 쓰고 라디오 하나 몬 맹글어 되것나. 누구라도 해야 하는 기 안이가? 우리가 한번 해보는 기라. 몬자 하는 사람이 고생도 되것지만서도 하다보면 나쇼날이다, 도시바다 하는 거 맹키로 안되것나.』
1958년 4월 윤욱현을 주축으로 전기기기 생산공장 건립안이 마련되면서 락희화학의 라디오 생산계획은 착착 진행됐다. 시설 도입을 위해 8만5195달러의 초기 예산을 책정하고 서독인 기술자 헨케(H W Henke)와 2년 계약을 맺고 전자기기의 설계와 제작 책임을 맡겼다. 생산공장은 허준구(許準九, 당시 락희화학 상무)가 대표로 돼 있던 금성합성수지공업사 공장으로 정해졌다. 이에 따라 금성합성수지공업사는 1958년 11월 18일 경남도청에 공장(회사)명칭변경신청서를 내게 되는데 이 문건에는 변경된 회사명칭이 금성사(金星社), 업종은 합성수지 가공제조 및 각종 전기기재의 제조업, 대표자는 구인회로 기재돼 있었다.
이 문건에 등장하는 금성사가 바로 오늘날의 LG전자(실제 금성사가 출범한 것은 명칭변경신청서를 내기 직전인 1958년 10월 1일)다. 창업 초기 금성사의 조직은 사장 구인회 아래 부사장 구정회와 상무 허준구가 축을 이뤘다. 1959년 2월 구인회는 개인사업체였던 금성사를 자본금 1억환의 주식회사 금성사로 전환했다. 법인체로 전환한 것은 국제개발처(AID) 차관이나 은행융자를 확보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목표했던 국산 라디오의 개발은 1959년 6월부터 시작됐다. 이때까지 부족했던 기술인력들이 충원되고 플라스틱 식기류 제조 수준을 넘지 못했던 조직과 시설들도 설계실·프레스실·동선가공실 등으로 확대·증설됐다. 1958년 말을 전후해서 경금속가공시설·전선피복시설 등 라디오 생산설비로 서독에서 들여온 것만 25만달러 어치나 됐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설계는 기술주임 김해수(金海洙)가 맡았다. 중학교 교사출신인 김해수는 한국전쟁 때 부산에서 화평전업이라는 라디오상과 미군 라디오전문수리점을 경영한 바 있고 조립기술과 관련기술에도 능통했다.
설계 과정에서 참고모델로 삼은 것은 일제 산요(三洋)였다. 처음에는 기술고문 헨케가 서독제를 제안했으나 김해수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부품 가운데는 자체 제작이 어려운 진공관·스피커·레지스터·더스트코어·볼륨컨트롤 등은 서독에서 수입했다. 그러나 스위치·섀시·노브·트랜스·스크루·너트·플레이트·소켓·코드 등은 자체 제작에 성공했다.
첫 설계모델의 방식은 진공관 5개를 사용하는 2밴드(Band)형 슈퍼헤테로다인(Superheterodyne)수신 방식으로 결정됐다. 2개의 밴드로는 535∼1605㎑대의 중파(MW), 45∼165㎒대의 단파(SW)가 채택됐다. 슈퍼헤테로다인이란 수신된 방송전파를 일정한 폭의 중간 주파수로 떨어뜨린 후 증폭기를 이용하여 충분한 증폭도와 선택도를 취한 다음 검파(檢波)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 방식을 채택한 라디오는 음질이 안정되고 선택도가 매우 좋은 것이 특징이었다. 김해수는 첫 모델의 중간주파수를 445㎑로 정했다.
전원은 교류 100V가 표준이었으나 당시 전력사정이 나빠 50V 이하까지 낮아지는 일이 발생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50V에서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스피커는 5인치짜리로, 최대 출력은 2W로 했다. 캐비닛은 설계실 요원이 제작한 8종 가운데서 178×429×163㎜의 제원을 가진 비교적 길고 날씬한 것을 택했다.
시제품이 완성된 것은 김해수가 설계에 착수한 지 3개월여 만인 1959년 8월 말이었다. 금성사는 이때 80대의 시제품을 조립해 놓고 상품화 방법과 시기를 저울질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패킹콘덴서의 용량 규정을 놓고 기술총책임자인 곽병주(郭炳柱)와 기술고문 헨케 사이에 이견이 생겼다. 헨케는 앞서 설계자 김해수와도 마찰이 있었던 터라 이 사건을 계기로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이런 문제들을 매듭짓고 시제품을 소비자들이 구매할 수 있도록 상품화하는 데 3개월여가 소요됐다. 이때 「A501」이라는 모델명과 케이스 왼쪽 상단에 붙인 왕관모양의 마크 및 케이스 하단 왼쪽에 부착한 「GoldStar」라는 로고가 만들어졌다.
모델명 「A501」에서 A는 교류전원(AC)의 첫자, 5는 채택된 진공관수, 01은 국산 제1호라는 뜻이었다. 왕관마크는 별(금성)을 연상토록 한 것이고 「GoldStar」는 한자 금성을 풀어 영문표기한 것이었다. 이 마크와 로고는 락희화학 서울사무소 판매3과장으로 재직중 금성사 라디오판매부서로 자리를 옮긴 이헌조(李憲祖, LG전자 부회장 역임)의 작품이었다.
「A501」의 케이스는 소비자의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다섯 가지 색깔로 다양화하는 배려도 있지 않았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 「A501」 80대가 금성사의 부산 연지동 공장에서 전국의 전기상점으로 첫출고가 된 것은 1959년 11월 15일이었다. 1895년 마르코니가 무선전신을 발명한 지 64년 만에 그리고 1927년 이 땅에 처음 라디오방송국이 개국한 지 32년 만의 일이었다. 한국의 전자산업이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지르며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이때의 감격을 부산의 국제신보(현 국제신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라디오가 드디어 쇼윈도에 나타나게 된다. 그동안 라디오 생산에 필요한 제반시설을 갖추어 오던 금성사는 마침내 다량 생산단계에 들어갔으며, 오는 11월 15일경부터 전국 상점에 일제히 공급하게 되었다. 약 300명의 종업원이 일하는 현대적 시설로 한달에 3000대를 만들 수 있는데 우선 처음 나올 제품은 세 가지 종류이며 제일 먼저 나올 것이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골드스타」 A501호이다….」 <국제신보 1959년 11월 4일자>
국산 라디오 제1호 「A501」의 소비자가격은 2만환이었다. 미군PX에서 흘러나온 외제 라디오가격이 3만3000환 정도였으니 「A501」은 이것에 비해 약 40% 가량 저렴했던 셈이었다.
1977년 한국방송협회가 간행한 「한국방송사」에 따르면 1959년 말 우리나라 라디오 보급대수는 31만6000대였으며 그 대부분이 외제였다. 첫 출하된 「A501」 80대는 이 숫자에 대항하는 첫 시도였다. 한국의 전자산업도 그렇게 출발했다.
<서현진기자 jsu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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