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과학의 날> "과학의 날" 맞아 되돌아본 과학기술계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의 활기가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 지난해 격한 구조조정의 회오리를 겪은 출연연이 두꺼운 껍질을 벗고 연구정체성 확보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외형적인 구조조정이 생색내기용이라면 이제는 과학기술 발전에 핵심역할을 하는 연구원들의 연구의욕을 복돋워 주는 일이야 말로 국가 장래를 위해서라도 화급히 해야 할 일이다. 사회 전반에 대개혁과 함께 "젊은 피 수혈론"이 화두인 요즘 진정한 출연연의 개혁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천년을 앞두고 과감한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점이다. 과학의 날을 맞아 연구현장의 기를 살려줄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알아본다.

<편집자>

 「과학기술 활성화를 위한 심포지엄」 「출연연 연구분위기 조성을 위한 세미나」 「대덕연구단지 중장기 발전전략.」

 국내 연구중심지인 대덕연구단지에서 요즘 연일 개최되고 있는 세미나·심포지엄·토론회·좌담회·포럼 등이다. 이른바 「연구기관의 역할 정립」이라는 대명제 해결을 위한 과학기술계의 처절한 몸부림이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단골 주제는 「연구기관들이 왜 이렇게 침체되었는가」 「그 책임과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등이다.

 구조조정이다 해서 외압에 떨어질대로 떨어진 과학기술자의 자존심 회복을 위해 과학기술계 스스로 자가진단하기 위해 시도된 몸짓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부당국, 과학기술계 그 누구도 현 상황에 대한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 과학기술계는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대내외에 알리자」는 수준의 애꿎은 구호만 난발하는 짓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과학기술계 침체의 원인을 경제불황, 정책부재, 국민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몰이해 등 외부요인으로 돌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올해로 연구원 생활 15년째인 40대 후반의 K연구소 P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기술계가 전반적인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지난 정부와 현 정부의 과학기술에 대한 마인드 부족에서 기인합니다. 한마디로 연구기관을 우습게 아는 겁니다. 현실감과 동떨어진 과학기술 정책이 연구현장을 괴롭게 만듭니다.』

 이같은 상황인식은 대덕연구단지내 모든 연구원들이 공감하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과학기술 활성화를 위한 많은 정책을 입안한 경우도 드물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G7과제, 스타프로젝트, 기관고유사업, 국가지정연구실제도 등 거창한 정책들이 제시돼 왔다.

 그러나 그 계획은 단발적인 「각성제」에 불과한 것으로 연구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연구기관장과의 친분, 국가과학기술정책 입안자의 전공분야에 따라 매번 국가연구개발과제 선정기준조차 달라진 게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 과학기술계는 자신에 대해 상당히 관대해왔다. 반면 자신의 일 이외에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았다.

 남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다 보니 자신의 연구실 이외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고 과기정책 수립시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피력해본 일이 없다. 자신의 발언이 국가과학기술 정책수립에 반영될 리가 없다는 체념이 습관화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과학기술계에 흔히 원로라 일컬어지는 과학기술 1세대가 아이디어를 가진 젊은 연구원들에게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발언권을 주지 않고 있는 것이 더 큰 원인이다. 출연연이 등장한 지 지난 30여년동안 과학기술정책을 자문하고 이끄는 것은 당연히 1, 2세대의 몫이라는 원로과학자들의 눈에는 젊은 과학자들의 발전적인 주장이 한낱 경험없이 외치는 소리로 치부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기술계는 시대의 요구가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70년대 과학기술 발전모델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는 등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새로운 천년을 눈앞에 둔 현시점에서도 국가과학기술 원로들은 과학기술계 곳곳에서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이달 중순 대덕연구단지에서 열린 과학문화재단 주최의 「21세기 열린 과학기술 환경대토론회」다.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서 과학기술의 역할과 책임을 논의하는 자리에 정작 21세기 주역이 될 젊은 과학자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대부분이 50대 후반 이후의 노장 과학자들이 참석, 자신들이 21세기 과학기술을 어떻게 이끌 것이며 과학기술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출하는데 또다시 주역으로 남고 싶어 했다.

 실추된 연구원들의 사기 진작책을 마련해 보자는 자리에서도 현업에서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실무진을 불러 직접적인 소리를 제대로 들은 적이 없고 장관초청, 총리초청 간담회에도 과학기술계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문제는 덮어두고 보자는 식으로 젊은 과학자들의 돌출발언을 우려해 50, 60대 책임급 연구원들을 내보내는 것이 과학기술계의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1세대 과학자들의 지나친 기득권 유지가 신진 과학자들을 연구만 수행하는 연구로봇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면은 바로 1, 2세대들이 갖고 있는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배타적이고 비과학적인 풍토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현실은 1, 2세대의 자기 본위적인 판단도 있겠지만 3세대 과학자들의 자기 「목소리 찾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1, 2세대는 70년대 초기에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산업발전, 과학기술의 기반을 조성하는데 큰 역할을 해낸 게 사실이다. 그러나 보릿고개를 넘으며 연구개발을 하던 그 시기와 새로운 밀레니엄을 준비하는 현재는 분명히 다르다.

 1세대 과학자 L모 박사는 솔직한 심정을 이렇게 말한다.

 『최근의 기술동향에 대해 전혀 적응이 안됩니다. 이 분야는 당연히 국내외에서 관련 분야를 공부한 신진 과학자들의 몫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장 과학자들이 자신의 친분·지연·학연 등을 이용해 과제를 독점하는 바람에 젊은 과학자들의 연구과제가 없어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합니다.』

 최근 정치권에서도 「젊은 피 수혈론」이 대두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기술계도 새로운 천년을 대비해 신진 과학자에 의한 새로운 연구개발과제 수립과 정책수립이 이뤄져야 한다.

 오늘은 과학의 날이다. 진정 국가장래를 생각한다면 이제 새로운 세대를 위해 과감히 현재의 자리를 물려주어야 할 시점이다. 원로는 경험없는 과학자들에게 경험을 제공하는 정도에서 원로의 역할이 지켜져야 하고 30, 40대 젊은 과학자들은 과학기술계의 주역으로 머리를 싸매고 연구에 몰두해야 한다.

 불행히도 우리 과학기술계는 과학기술 예산을 매몰차게 깎더라도, 경제불황에 대한 책임을 새로운 과학기술이 없기 때문이라고 매도할 때도 이를 책임질 과학자나 과학기술 정책입안자는 누구도 없었다. 역사가 회귀하지 않듯이 과학기술계도 회귀하지 않는다.

 우리 과학기술계 1, 2세대는 박정희 정권시절부터 국민의 정부까지 정부 주요 보직에서 많은 역할을 수행했다. 무려 30여년동안 과학기술 정책수립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왔다.

 정부출연연구기관에 대한 구조조정과 인력감축으로 많은 젊은 과학자들이 민간기업으로 혹은 외국기업으로 떠나갈 때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연합이사회라는 조직을 새로 만들었고 원로라는 이름으로 모두 그 자리에 살아남았다.

 과학의 날을 맞아 이제 우리 과학기술계는 「왜 젊은 연구원들이 대덕연구단지를 떠나고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새로운 천년을 과학기술과 함께 하려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항상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추구해야 하는 과학기술의 논리는 그런 면에서 타당하다.

<대전=김상룡기자 srk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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