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끝없는 혁명 (5);제 1부 혁명전야 (4)

전기 통신과 開化

 일본의 소니가 세계 최초의 트랜지스터식 TV를 발표했던 1958년, 한국에서는 금성사(金星社)라는 자본금 1억환 규모의 전자기기 제조회사가 탄생했다. 금성사는 이듬해인 1959년 국산 전자제품 1호인 진공관 라디오 「A-501」의 생산에 성공했다. 이 사건이 바로 한국 전자산업의 공식적인 출발점이 된다. 세계적으로 이미 트랜지스터식 TV의 개발 소식이 전해졌는데 한국에서는 이제 겨우 진공관식 라디오라니….

 지난 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세계 전자산업의 출발점은 미국에서 라디오가 생산된 1920년을 전후로 한 시기가 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전자산업은 세계를 대표하던 미국에 비해 무려 40여년 늦게 출발한 셈이다. 전자관(Electronic Tube)의 발명으로 탄생한 전자공학의 출발시점에서 본다면 그 차이는 무려 60여년이나 된다.

 그 60여년 동안 한국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세계 전자산업의 출범 전인 19세기 미국과 유럽의 상황이 그러했듯 우리나라의 출범 전야도 전기와 통신의 초창기 보급 움직임이 전체 분위기를 좌우하고 있었다.

 산업화 이전 우리나라 전기·전자의 도입 역사는 조선정부가 미국의 타운젠트(한국명 他雲仙)상사로부터 발전기와 관련설비를 들여온 1887년을 원년으로 하고 있다. 이 해 타운젠트 소속의 전기기사 윌리엄 매케이는 경복궁 향원정(香遠亭)에서 3㎾ 규모의 증기발전기를 설치한 다음 조선정부 관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열등(100촉광) 2기의 점화식을 가졌다. 근대 문명의 상징인 전등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밝혀지는 순간이자 구중궁궐의 신비가 전기의 힘으로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전등에 대한 신기한 느낌은 뒷전인 채 궁내는 온통 괴기와 공포의 분위기로 휩싸이고 말았다. 매케이가 원지(苑池, 향원정을 둘러싸고 있는 연못)의 물을 이용해서 증기발전기관을 냉각하자 연못에 열탕환류(熱湯還流) 현상이 일어나며 물고기들이 횡사하는 이른바 증어(蒸魚)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한동안 불길하고 괴기스런 소문으로 도성 안팎에 퍼져나가 민심을 흉흉하게 하기도 했다. 전기는 이처럼 미명(未明)의 땅에 상륙하면서 그 신기보다는 괴기의 이미지로 우리 곁에 다가왔다.

 전기사업의 본격화는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듬해인 1898년(광무2년)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윅이 정부로부터 서울시내 전기사업 경영권을 얻어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고 서대문과 홍릉간 궤도와 전선로를 개설한 것이 계기가 됐다. 1900년 4월 10일 두 미국인은 마침내 동대문에 125㎾급 발전기를 설치하고 종로 일대 민가에 송전을 시작했다. 다음날 황성신문은 이 날의 사건을 『전기회사에서 작일(昨日)부터 종로에 전등삼좌(電燈三坐)를 연(燃)하였더라』고 보도했는데 1966년 정부는 이 기사를 토대로 4월 10일을 「전기의 날」로 제정한 바 있다.

 한성전기회사를 필두로 전국 도시에 독자적인 전기회사들이 설립됐다. 전기회사들은 소규모이긴 했지만 발전·배전시설을 직접 설치하여 운용했고 여기에 따른 전기기기와 자재들의 수요를 유발시켰다. 초창기 수요의 대부분은 미국과 일본 수입품으로 충당됐다. 마침내 1910년 일본인들에 의해 운영되는 전구생산공장이 처음 부산에 설립됐다. 1917년에는 소형 전구를 하청 생산하여 일본인 회사에 납품하는 조선인 가내수공업자들이 등장했다. 이어 1924년 경성전기학교(현 수도전자공고)의 설립은 전기기술자들의 대규모 양성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나라에 전기기기의 생산과 이용의 확대를 가져왔다.

 1930년대 중반은 만주침공을 앞둔 일제가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는 데 혈안이 돼 있던 시기였다. 이 당시 한반도에는 20여개가 넘는 일본 전기전자회사의 출장소들이 설립돼 활발한 활동을 벌였는데 주요 회사들로는 니혼전기(日本電氣)·고가전기공업(古河電氣工業)·미쓰이물산(三井物産)·미쓰비시전기(三菱電氣)·시바우라제작소(芝浦製作所)·도가전구(東亞電球)·니혼전지(日本電池)·니혼애자(日本碍子) 등이 있었다.

 민족자본에 의한 전기기기회사의 탄생은 1935년 임병철(林炳喆)에 의해 설립된 임전구제작소(林電球製作所)가 그 원조다. 임전구는 일본에서 수입한 원자재로 백열전구를 자체 생산하여 국내와 중국 등에 공급했다. 임전구에 이어 설립된 민족자본기반 전기관련회사로는 박완근(朴完根)의 금강전구(1940년), 배정기(裵貞基)의 조선기업(1943년) 등이 있다.

 중전기 분야에서는 고가·쓰미모토(住友)·도쿠라(藤倉) 등 일본 3사가 합작하여 세운 조선제련 시흥 전선공장(현 대한전선)을 필두로 고가전기공업의 동양전선, 시바우라제작소의 인천 전선공장, 오사카변압기(大阪變壓器)의 영등포 변압기공장, 미쓰비시전기의 인천 공장 등이 차례로 설립됐다. 하지만 이들 시설은 어디까지나 일제의 대륙침략용 군수공장으로서의 목적이 앞선 것이었다.

 한편 전기가 도입되기 2년 앞서 우리를 놀라게 했던 또 하나의 신문명이 바로 전기통신이었다. 1885년 9월 전기통신 가운데 가장 먼저 모스 부호를 이용한 전신이 서울(漢城)과 제물포(仁川)간에 개통됐다. 개통에 앞서 조선정부는 1885년 6월 청나라와 「의주전선합동(義州電線合同)」이라는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다. 조약의 골자는 서울과 의주간을 잇는 전선을 가설하고 그 경영은 청나라의 중국전보국(일명, 華電局)이 맡는다는 내용으로서 서울-제물포간 전신 개통(전선로 설치 포함)은 그 선결조건이었다. 이때 서울에 설치된 정부기관이 한성전보총국이었다. 한성전보총국에 1년 앞서 설치된 것이 우정총국(郵政總局)인데 1884년 홍영식(洪暎植)은 이곳에서 최초의 근대우편제도 시행에 나섰으나 20일 만에 갑신정변의 회오리 속에 중단되고 말았다.

 경인간 전신선로에 이어 1885년 10월에는 서울-의주간 서로(西路) 전신선로가 개통됐다. 서로의 개통으로 비로소 우리나라는 청나라를 거쳐 유럽까지 전기통신이 가능하게 됐다. 1888년에는 공주-전주-대구-부산을 연결하는 남로(南路) 전신선로 개통을 계기로 한성전보총국의 업무가 폭주하면서 조선전보총국이 탄생했다. 조선전보총국은 1891년 춘천을 경유하여 원산에 이르는 북로(北路) 전신선로를 완성했다.

 1893년 갑신정변의 와중에 폐지된 우정총국의 업무와 조직이 재건되면서 조선전보총국과 통합돼 우편총국이 탄생했다. 우편총국은 1년 후인 1894년 갑오경장에 때맞춰 공무아문(工務衙門) 소속의 전신국(電信局)으로, 1895년의 관제개혁 때는 농상공부의 통신국(通信局)으로 각각 개편되었다. 통신국은 1900년에 다시 외청 격의 통신원(通信院)으로 승격됐다.

 통신원의 가장 큰 성과는 1902년 3월 서울-제물포간 전화의 개통이었다. 서울-제물포간 전화 개통을 계기로 교환업무 등에 필요한 「전화규칙」이 공포되고 이에 대한 시행령인 「전화세칙」이 통신원령으로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이미 1896년부터 왕실을 관장하는 궁내부(宮內府)와 종합청사격인 의정부(議政府) 내에는 각각 구내 행정전화가 가설돼 운용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울-제물포간 전화 개통은 교환업무에 의한 최초의 공중전화 등장이자 본격적인 전화사업 개시를 알린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의 발효로 실질적인 주권이 일본에 침탈되기까지 우리나라의 전화사업은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펼쳐졌다. 서울을 중심으로 개성·평양·수원 등 주요 도시로 공중전화 설치가 확대되고 각 도시마다 고유한 교환업무가 생겨난 것도 이 시기였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일제는 대한제국 통감부 산하 통신관리국을 통해 전국적인 경비전화망 설치를 완료했는데 이는 한반도 내 의병항쟁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1911년 일본 해군은 제물포 월미도와 그 앞바다에 떠있던 군함 광제호(光濟號)에 무선전신시설을 갖추고 통신을 시도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무선전신 기록이다. 월미도와 광제호간 무선전신시설은 황해의 기간항로인 다롄(大連)항로의 중계국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조선총독부 소속 통신국이 관리하던 우리나라 전기통신은 공전식(共電式) 전화시설이 자동전화시설로 바꿨고 무장하(無裝荷) 케이블시설이 증가하는 등 양적인 발전을 꾀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기 동안 한반도 거주 전체인구 중 약 2%에 불과했던 일본인들이 전화가입자의 8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1937년의 중일전쟁, 1941년의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나마 보급됐던 민간 전화시설들이 강제로 징발되고 한글전보가 폐지되는 등 여러가지 폐해가 잇따랐다. 이 시기의 전기통신 상황에 대해 1985년 체신부가 발행한 「한국전기통신 100년사」에는 『혹자는… 이 시대가 한국의 통신 발달에 제법 기여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나 이는 매우 피상적인 견해에 불과하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공중개방(公衆開放)보다는 공중제한(公衆制限)의 의미가 강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일제의 심장부 도쿄에서 도쿄방송이 개국한 지 2년 만인 1927년 일본어·조선어 병용방송인 경성방송(JODK)의 개국도 사실은 이같은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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