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국내 가전업계는 사상 최대의 시련과 고난의 한해였다.
IMF 이후 국내 소비가 완전히 사라지면서 가전제품의 판매는 예년에 비해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가전업계가 위기극복을 위해 연초부터 총력을 경주했던 수출마저 러시아·동남아 등 수출 전략지역의 경제위기로 인해 원화가치 하락이라는 호재에도 불구하고 지난해에 비해 10% 이상 줄어들었다.
이같은 내수와 수출 부진은 결국 가전사업을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없는 한계사업으로 인식시켰으며 이것은 국내기업들이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가전사업을 정리대상 1순위에 이르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실제 국내 가전산업을 이끌고 있는 가전3사는 가전사업 관련조직을 분사 또는 축소했으며 소형가전사업의 대부분은 협력업체로 이관하는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작업을 추진해왔다.
내수시장이 얼어붙었던 가장 큰 이유는 구조조정에 따른 실업률 증가로 소비성향이 더욱 위축됐기 때문이다. 실업률이 지난해의 2.6%에서 7.4%로 늘어나면서 민간의 소비지출 또한 지난해 3.5%에서 올해에는 마이너스 13.6%로 감소해 내구소비재인 가전제품 판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가전제품 대부분의 보급률이 포화상태를 이룬 상태에서 대체수요가 경기위축으로 대기수요로 몰리면서 실구매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여기에 가전업계간 수요확보를 위한 치열한 가격경쟁이 전개되면서 시장규모를 더욱 축소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이에 따라 가전업계가 올 한해 가장 대표적으로 내걸었던 상품이 바로 IMF제품이다. 거품을 빼고 기본기능을 강조해 가격을 최대한으로 낮춘 IMF제품은 일단 소비자들의 구매의욕을 부추기며 내수시장의 명맥을 이어가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던 게 사실이다. 50만원대 대형컬러TV, 10만원대 VCR와 전자레인지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한편으로 가전업계는 IMF와 상관없이 구매력을 갖고 있는 고소득층을 겨냥해 고가의 대형제품들도 잇달아 출시했다. 40인치 이상의 프로젝션 TV, 완전평면 TV, 양문 여닫이형(사이드 바이 사이드) 냉장고 등은 기존 제품에 비해 가격이 30% 이상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판매가 증가하며 독자적인 시장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내수시장의 침체가 예상되면서 연초부터 수출에 총력을 기울였던 가전업계에 수출부진은 가전산업 기반을 흔들리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연초 원화가치 하락으로 국산 가전제품의 가격경쟁력이 살아나면서 수출이 살아나기 시작했으나 국산 가전제품의 주력 수출시장이 경제위기로 무너지면서 가전업계는 해외공장 철수를 검토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몰렸다.
미국과 유럽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심각한 경제난에 봉착하면서 국산 가전제품의 수출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다. 인도네시아에서부터 촉발된 동남아국가들의 금융위기는 마침내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이어져 이들 특정지역에서 우위를 점해왔던 국내 가전업계는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들 전략시장은 국산 가전제품의 주요 수출대상국일 뿐 아니라 국내 가전업계의 생산 및 판매거점이라는 점에서 해외 생산 및 판매기반에도 악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외환위기에 따른 중장기 해외투자 전략이 전면 중단되면서 국내 해외공장은 갈수록 채산성이 악화됐다.
가전업계가 해외생산보다는 국내 생산시설을 확충하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해외사업장을 인근 지역으로 이전하거나 해외사업장의 생산성 향상에 주력했던 것도 갈수록 채산성이 악화되는 해외사업장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수출부문에서 가장 관심을 모았던 것은 냉장고·세탁기·에어컨·전자레인지 등 백색가전제품의 수출호조다. 이들 백색가전제품은 그동안 대부분 내수용 제품으로 인식돼왔지만 올들어 미국·유럽·중동 지역으로부터 주문이 쇄도하면서 국산 가전제품의 수출을 이끌어가는 효자상품으로 급부상했다.
냉장고의 경우 열악한 수출환경에서 전년대비 21%라는 높은 신장세를 나타냈으며 전자레인지는 2.6%, 에어컨도 2.0%의 증가세를 나타냈다.
백색가전제품의 수출이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국내 가전업계 대부분이 주요 해외시장에 생산기지를 확보하고 현지 실정에 맞는 제품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사실 백색가전시장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현지업체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국내 가전업계가 기술력을 앞세워 현지 실정에 맞는 제품들을 대량으로 생산하면서 가격 및 품질 경쟁력을 확보함으로써 로컬업체들이 차지하고 있던 시장을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AV기기는 이미 세계시장 자체가 포화상태에 이른데다 동남아 및 중국산 저가제품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면서 가격경쟁력 상실로 큰 폭의 감소세를 면치 못했다. 특히 국내업체들은 AV기기의 채산성이 떨어지면서 생산기지의 대부분을 해외로 이전한 것도 AV기기의 수출이 큰 폭의 감소세로 돌아선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컬러TV는 지난해에 비해 수출이 16.6% 줄어들었으며 VCR는 41%, 라디오카세트는 30% 이상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가전업계에 커다란 시련과 고난을 안겨줬던 98년은 국내 가전업계로 하여금 이같은 역경을 극복하면서 오히려 기반을 탄탄히 할 수 있는 기회의 한해가 됐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올해 가전업계의 가장 큰 경사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의 반덤핑 규제로부터 완전히 풀려나게 됐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삼성전자가 지난 8월 세계 반덤핑 역사상 처음으로 미 정부로부터 컬러TV에 대한 반덤핑 무혐의 결정을 이끌어낸 데 이어 LG전자와 대우전자도 일몰재심에 참여해 반덤핑 규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됐다.
또 EU로부터도 가전3사 모두 반덤핑 종료결정을 받음으로써 내년부터 가전3사는 자유롭게 국내에서 생산된 컬러TV를 미국이나 유럽으로 수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8년 동안 국내에서 생산된 컬러TV의 미국 직수출을 전면 중단했던 국내 가전업계로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미국시장을 직접 공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EU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올 11월부터 시작된 디지털TV 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 디지털TV를 국내업체들이 본격적으로 양산에 들어간 것도 국내 가전산업의 전망을 한층 밝게 해주는 쾌거다. 삼성전자가 세계 TV업계로는 처음 디지털TV의 양산에 착수한 데 이어 본격적으로 미 현지에서 판매에 들어갔으며 LG전자도 미 투자법인인 제니스를 앞세워 시장선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내년부터 미국으로의 대량수출이 본격화되고 디지털TV시장이 활성화된다면 국내 컬러TV산업은 제2의 수출도약기를 맞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그렇지만 올 한해를 결정짓는 최대의 이슈는 역시 삼정전자가 대우전자를 인수하는 빅딜이다. 이같은 빅딜이 성사될 경우 국내 가전산업은 기반부터 재편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이미 가장 글로벌화된 국내 가전산업의 특성상 세계 가전산업에도 엄청난 파급효과를 미칠 게 분명하다.
다만 이같은 빅딜이 현재 정부의 종용에 의해 진행되고 있지만 양사의 임직원들은 물론 전자산업 관련 종사자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어 성사여부는 상당히 불투명한 상태다. 그렇지만 빅딜에 따른 여파가 워낙 크기 때문에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빅딜 추진상황은 국내 가전업계의 최대관심사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가전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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