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관람석] 허진호 감독 "8월의 크리스마스"

죽음을 앞둔 남자에게 시작된 사랑이야기. 허진호 감독에겐 충무로 입성을 알린 성공적인 데뷔작이 되었지만 고(故)유영길 촬영감독에겐 유작(遺作)이 되어버린 영화다.

빛바랜 앨범을 뒤척이며 아련한 가슴앓이를 되새기는 듯한 짧은 사랑의 이야기가 따뜻하고 세련된 시선으로 포장된다. 허진호 감독은 한국영화에서는 「도전적」이라고 불릴만한 과감한 롱테이크와 절제된 영상으로 순수하고 담백한 사랑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첫사랑의 추억을 간직한 채,작고 볼품없는 변두리 사진관을 경영하는 정원(한석규 분). 그는 아버지와 함께 평범한 일상생활을 꾸려가며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아는 사람의 장례식에 갔다가 지쳐 돌아온 어느 무더운 여름,주차단속원 다림(심은하 분)이 그를 찾아온다. 정원의 사진관 근처에서 주차단속을 하는 그녀는 단속 차량들의 사진을 맡기기 위해 사진관을 드나들게 되고 차츰 정원의 평범한 일상 속으로 끼여든다. 다소 당돌하게 느껴지지만 구김살 없는 다림의 행동이 정원도 싫지만은 않다. 그리고 오후의 나른한 햇살처럼 시작되는 사랑.

둘은 서로의 삶에 조금씩 발을 내딛으며 다가서지만 정원에겐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 앞에 시작된 또 다른 사랑이 더욱 가슴아플 뿐이다. 우연챦게 시작된 첫 데이트 이후,정원은 병원으로 실려가고 이를 모르는 다림은 문 닫힌 사진관 앞을 서성이며 자신의 사랑을 기다린다. 불이 꺼진 사진관 앞에서 기다리길 며칠 째,다림은 그에게 편지를 써 사진관 안으로 밀어 넣지만 그녀의 사랑엔 여전히 응답이 없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국영화의 「과잉 감정 노출」이라는 노선을 피하면서 관객들에게 어떻게 접근해 갈 수 있는가에 대한 모범답안이 될 수 있다. 「과장없이 전개되는 일상 속의 평범함」이란 그 오래된 명제가 바로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힘이 되고 있다.

연기면에서 특히 심은하의 성장은 매력적이다. 그녀는 세 번째 영화인 이번 작품에서 「스크린 스타」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에 반해 한석규의 연기는 영화가 지닌 절제의 미학에 스며들지 못한 위험스런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주목받을 수 있는 공로는 단연 한석규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가 없었다면 「8월의 크리스마스」와 같은 절제된 감수성의 영화가 한국영화계에서 만들어질 수 있도록 「허락」받는데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했을 것이다. 멜로영화의 포문을 열었던 「접속」이나 「편지」보다 높은 영화적 완성도를 보여준 수작이다.

<엄용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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