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침침한 필름 보관 창고를 2시간 동안이나 뒤져도 4년 전 촬영한 K씨의 X레이 필름을 찾을 수 없었다. P과장에게 야단맞을 것을 생각하니 아찔하다. 필름 창고를 찾은 것이 오늘만 벌써 다섯번째로 4시간을 허비했다. 하긴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다. 어두침침한 필름 창고에서 시커먼 필름을 찾느라 온통 먼지를 뒤집어쓰고 땀범벅이 되던 지난 여름에 비하면 오히려 행복하기까지하다. 그 어려운 대학입시 관문을 뚫고 누구나 선망하는 명문대 의대에 입학할 때만 해도 국내 최고의 의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에게 인술을 베풀겠다는 생각으로 몇날 며칠을 뜬 눈으로 새우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소박한 꿈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진료나 연구보다는 필름 찾는 일이 나의 주 일과가 돼 버린 것이다. 이제는 의사라는 직업에 회의가 들 정도다.』
국내 유수의 대학 부속병원에서 레지던트 2년차로 근무하고 있는 L씨의 일기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의료영상시스템의 총아로 부상한 의료영상 저장전송시스템(PACS)이 X레이 필름 보관에 따른 제반 문제를 일시에 해결하기 때문이다.
PACS를 구축할 경우 필름을 찾으러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필름 분실의 우려가 없으며 언제라도 필요한 영상을 여러 명의 의사가 동시에 볼 수 있다.
특히 필름 인화비용보다 저렴하게 관리할 수 있으며 필요할 때 얼마든지 인화할 수 있고 다양한 영상처리도 가능하다.
그뿐 아니라 21세기 최대 황금어장인 보건의료산업과 정보통신산업이 접목되면 인터넷을 이용해 가정은 물론 지구촌 어디에서나 세계 각국의 명의로부터 치료받을 수 있는 원격진료가 실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터넷을 이용한 원격진료 및 의료정보 제공의 경우 기존 전화선이 모두 광통신망으로 교체되는 2015년이 되면 일반화될 전망인데 이때가 되면 각 의료기관과의 정보전달은 물론 가정과 의료기관간 신속한 접촉이 가능해진다. 가정에 설치돼 있는 카메라로 환자의 고통스런 모습이나 증상이 인터넷을 통해 영상으로 전송되고 전자청진기를 가슴에 대고 멀리 떨어져 있는 의료진에 심장박동 소리를 들려줄 수도 있다.
멀티미디어 및 인터넷을 이용한 의료는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진단에만 응용되지 않고 의료용 수술로봇과 결합해 원격치료까지 가능하게 한다. 실제 걸프전쟁 당시 이같은 기술이 미국에 의해 시험됐으며 보스니아, 소말리아 등 미군이 대량 파견돼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활용하게 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PACS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기술들이다.
PACS는 X선 촬영장치, 초음파 영상진단기, 컴퓨터 단층촬영장치(CT), 자기공명 영상진단장치(MRI) 등 영상진단기로부터 진단영상을 디지털 형태로 획득한 후 중앙의 컴퓨터에 저장해 데이터베이스화한 후 의사가 필요할 때 영상 조회부의 워크스테이션 상에서 조회 및 전송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포괄적 디지털 영상관리시스템이다.
PACS는 이미지 디스플레이 워크스테이션과 모니터, 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 프로토콜, 데이터베이스와 컨트롤러 등으로 구성되며 전자, 전기, 컴퓨터, 의학, 통신, 통계 등 다수의 학문이 결합된 종합예술이라고까지 한다.
PACS란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초반의 일이다. 원래 순수 의학보다는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PACS의 유용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폭넓게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의 일이다.
미국의 경우 약 10년 전부터 대학과 연구소를 중심으로 PACS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PACS가 실용화된 것은 지난 92년 미 육군 메디건병원에 세계최초로 풀 PACS가 설치되면서부터다. 그 후 볼티모어 원호병원, 라이트페터슨병원과 영국의 헤머스미스병원에서 필름을 사용하지 않고 방사선과 영상을 컴퓨터로 조회할 수 있게 되면서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또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미국 PACS시장과 경쟁하기 위해 EuroPACS를 구성, 최근 공동개발에 성공함으로써 현재 많은 중소병원에서 PACS가 가동되고 있다.
일본은 홋카이도병원에 전산화방사선진단장치(CR)를 기본으로 하는 PACS를 설치, 운용하고 있고 작은 규모의 PACS가 많은 병원에 설치돼 있다. 특히 일본은 95년 후생성에서 ISAC(Image Save and Carry)와 PACS를 위해 필름 대신 디지털 영상을 사용하는 것을 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PACS 보급 활성화의 기반을 만들어놓은 상태다. 우리나라는 선진국보다 다소 늦은 90년대 들어 PACS 도입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94년 후반 삼성의료원이 개원과 동시에 미국 로렐(현 GE)사의 PACS를 도입, 풀 PACS를 성공적으로 가동하고 있다. 현재 삼성의료원의 데이터베이스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기술적으로나 규모면에서는 물론 운용차원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PACS 구축사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뒤이어 서울중앙병원이 현대정보기술과 협력해 부분적인 PACS를 설치, 운영하고 있으며 서울대학병원이 방사선과 내에서 자체적으로 PACS를 개발, 내년까지 풀 PACS를 구축한다는 방침이다.
연세대학교도 97년 초 영동세브란스병원에서 CT와 MRI를 중심으로 메디페이스의 「Mini PACS」를 설치, 운용해 경제성을 확인한 후 신촌세브란스에도 CT, MRI, EBT, DSA 등의 장비를 모두 연결하는 PACS를 오는 11월경부터 가동할 예정이다.
또 98년 말에 개원할 예정인 의료보험관리공단 산하 일산병원이 PACS를 도입할 예정이며 대진의료재단, 강남성모병원, 성빈센트병원 등 다수의 병원들이 PACS를 구축중에 있다.
특히 최근 G7 프로젝트의 지정과제로 「PACS의 국내 규격 표준화」가 선정되었으며 현재 PACS학회와 방사선학회가 공동으로 PACS에 대한 보험수가 산정작업을 진행중에 있는 등 선진국 못지않게 PACS 붐이 일고 있다. 세계 PACS 기술수준을 한 눈에 알 수 있어 모든 PACS관련 전문가가 모이는 국제PACS학회까지 유치할 정도다.
이에 따라 현대정보기술, 삼성SDS를 선두로 LGEDS, 대우정보시스템 등 다수의 대기업들이 이 시장에 참여하고 있으며 투자도 확대해 나가고 있다. 또 메디페이스, KCC의료정보, 태원정보, 마로테크, 평창정보통신 등 중소 전문업체들도 각자 장점을 살려 대기업 및 외국 업체들과 경쟁할 채비를 하고 있다.
이처럼 국내 PACS시장이 역동적으로 움직이자 올해를 기점으로 GE, 지멘스, 필립스, 도시바, 이메이션, 히타치, 이메이션, 코닥, 후지, 아그파 등 다국적 기업들의 국내시장 진출도 본격화되고 있다.
세계 PACS시장은 순수 PACS만 포함할 경우 10억달러 규모이고 종합 의료정보시스템 및 주변기기를 모두 포함할 경우 70억∼8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해 국내시장 규모는 올해 최하 50억원, 최대 1백억원 미만일 것으로 예상되지만 내년부터 매년 1백% 이상의 고성장이 기대돼 2000년경이면 최하 5백억원 이상을 형성할 것으로 예측된다. 여기에 시장규모가 훨씬 큰 병원의료정보시스템, 처방전달시스템 등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모두 합할 경우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지게 된다.
그러나 PACS 보급이 더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들이 산적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의무기록 전산화에 따른 법적문제와 의료보험수가 산정문제다.
현재 PACS를 이용해 진단 및 수술을 하다 의료사고가 발생할 경우 책임소재가 명확하지 않으며 의료보험수가가 책정돼 있지 않아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도 회수할 방법이 없어 병원들이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실제 투자에는 나서지 않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PACS란 어느 한 업체가 자체적으로 모든 기술을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업체간 원활한 협조가 부족, 타사 장비끼리 상호 네트워크가 불가능한 일도 종종 발생한다. 이는 표준화 및 한글화 작업을 통해 국내 실정에 맞는 한국형 PACS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해결될 문제다.
아무튼 PACS는 이미 시대적 대세로 굳어져 신설 병원이나 기존 병원 등 모든 병원은 손익이나 대차대조를 떠나 싫든 좋든 이에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한 단계가 됐다.
<박효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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