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27)

행정전산망사업은 여러 행정기관이 관련되고 재정규모가 엄청나게 큰 국책사업인데다 컴퓨터와 통신이라는 첨단기술이 동원된, 선례가 없는 신규사업이어서 그 추진과정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따라서 사업추진이 예상보다 훨씬 늦어졌다. 그 사업의 진행을 지지부진하게 만든 요인으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사업주체인 내무부 등의 행정기관과 대행기관인 데이콤간의 갈등도 있었으나 또 하나의 요인으로 그 사업에 투입될 컴퓨터를어떻게 확보하느냐는 문제가 대두되었던 것이다. 즉 그 사업에 필요한 중형컴퓨터를 외국에서 도입하느냐 국내에서 개발하느냐 하는 문제가 걸려 있었다.

데이콤이 86년 4월에 작성한 종합계획안에 따르면 85년 6월부터 88년 12월까지로 잡힌 행정전산망 제1단계사업 기간에 소요되는 컴퓨터숫자는 주전산기 86대와 다기능사무기기로 불리던 워크스테이션 1만여대였으며, 그 기간에 소요되는 예산이 1천5백13억원이었다. 그중에서 국내 개발의 대상이 되는 컴퓨터는 주전산기라 불리는 슈퍼미니급 중형컴퓨터였는데, 그것의 개발 및 그것과 관련된 소프트웨어의 개발에 소요되는 비용이 전체 예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런데 맨처음 선정된 행정전산망사업은 정부의 각 부처에서 요구한 42개 업무중 우선추진사업으로 선정된 6개업무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것을 42개업무로 확대하면 거기에 소요되는 컴퓨터 대수와 비용이 엄청나게 늘어날 것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행정전산망사업뿐만 아니라 금융전산망.교육전산망 등 국가기간전산망으로 그 범위를 넓히면 그 숫자는 다시 몇 배로 늘어날 것이다.

이처럼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는 중형컴퓨터의 수요를 놓고 당연히 대두되는 문제는 국산이냐 외제냐 하는 문제였다. 대전제는 국산컴퓨터의 개발이었다.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이라는 발상 자체가 국내정보산업의 육성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실제로 국가기간전산망 조정위원회는 행정전산망사업을 국책사업으로 결정하기 직전인 84년 12월에 행정전산망용 컴퓨터시스템은 국내의 생산업체가 데이콤과 협조하여 공동개발을 한다는 원칙을 정해 놓은 바 있었다.

게다가 데이콤의 이용태사장은 국산컴퓨터의 개발론자였다. 그는 70년대부터 컴퓨터의 국산화를 외치고 다니다 정부나 대기업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그자신이 삼보컴퓨터라는 회사를 설립해 8비트 PC를 국내에서는 맨처음으로 생산해 낸 장본인이었다. 그러한 그가 행정전산망사업을 대행하는 회사의 장으로서 중형컴퓨터 구입에 대한 결정권을 쥐게 되었으니, 그 엄청난 수요를 국내 개발품으로 메꿔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이 개인용 컴퓨터는 만들고 있었지만, 메인 프레임(Main Frame)에 해당하는 중대형컴퓨터를 만들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없었어요. 한국내에는 그럴기술도 없고 시장도 없었죠. 그런데 행정전산망이란 게 이뤄지면 정부에서 쓸 수 있는 중대형컴퓨터만 해도 수백 세트가 됩니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사업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중대형컴퓨터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만난 거죠. 후진국 중에서 중대형컴퓨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게 되는 거죠. 돈을 벌려면 다른 후진국에서 안만드는 물건을 만들어 돈을 벌어야지 대만이나 싱가포르가 만드는 물건 가지고 어떻게 돈을 버느냐하는 생각에서 행정전산망에 들어가는 컴퓨터는 국산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그는 그러한 생각으로 주전산기의 국산화를 설계했다.

그런데도 데이콤은 행정전산망사업이 정부의 방침으로 확정되기전부터 외제컴퓨터의 도입 기종을 검토했다. 물론 행정전산망사업용 컴퓨터 전량을 도입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기술 전수를 조건으로 그 중 일부를 도입하여 국내에서 개발한다는 전략이었다. 기술이 백지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국내 개발을 밀고나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시 이용태사장의 말을 들어보자.

"국산 컴퓨터를 만드는데 있어서 어떤 전략을 짰느냐 하면, 처음부터 백지상태에서 시작해 만들어내기는 어려우니까 미국의 신생 회사 가운데 하나를 골라 비즈니스 파트너로 삼기로 했어요. 그래서 최초의 컴퓨터는 기술이전을 해준다는 조건하에 사오고, 다음 단계부터는 우리가 조립해서 만들고, 그 다음에는 연구개발을 해서 더 좋은 시스템을 만들면 거꾸로 그들에게 세계시장에 팔아달라고 할 작정이었죠"

외제의 도입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될 현실적인 이유가 또 있었다. 컴퓨터는행정전산망사업을 전제로 하여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행정전산망사업이란 막중한 국가적 사업을 앞두고 언제 개발될지도 모르고 또 그 성능도 예측하기 어려운 국산컴퓨터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도 없었다.

"처음에는 행정전산망사업을 제 때에 완성하기 위해 성능을 인정받고 있는 외국 컴퓨터를 도입할 생각도 했으나, 워낙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기왕이면 국내개발을 하자는 의견도 대두됐습니다. 그러나 데이콤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봤습니다. PC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드는 나라에서 호스트컴퓨터를 만들 수 있겠느냐는 거였죠.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쓸 것도 아니고 행정업무를 전산화하는데 쓸 것인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죠"데이콤 정보통신연구소장으로서 도입 기종의 선정작업을 맡았던 백인섭의 이야기였다.

이러한 데이콤에 반론을 펴고 나선 것은 전자통신연구소였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외국의 기술을 도입할 필요없이 국내에서 직접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 연구소측의 주장이었다. 행정전산망사업이 가져다 주는 엄청난 수요로 보아 중대형컴퓨터를 개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양자간에 행정전산망사업이 먼저냐 정보산업육성이 먼저냐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데이콤의 입장에서는 행정전산망사업이 먼저이고 정보산업육성이 나중이었으며, 연구소의 입장에서는 컴퓨터개발이 먼저이고 행정전산망사업이 나중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국내의 컴퓨터개발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과연 우리가 주전산기라 불렀던 슈퍼미니급 중형컴퓨터를 개발할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 컴퓨터생산의 역사는 군소업체가 청계천에서 애플(Apple)컴퓨터를 복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러던 중 81년 10월 삼보컴퓨터가 8비트짜리 PC를 조립하여 한국전자박람회에 출품한 일이 있었고, 이듬해부터는 실제로 제품을 생산해 냈다. 82년 전자통신연구소의 전신인 전자기술연구소는 교육용 컴퓨터를 개발, 보급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금성사.동양나이론.삼보컴퓨터.삼성전자.한국상역 등과 공동개발에 착수한 결과 이듬해에 5천대를 생산하여 실업고등학교를 중심으로 보급했다.

이 사업으로 우리 산업체들은 컴퓨터의 복제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후 84년 삼성전자가 전자기술연구소와 공동으로SSM 16이라는 16비트 마이크로컴퓨터를 생산했고, 행정전산망사업이 국책사업으로 결정될 무렵인 85년에는 32비트 마이크로컴퓨터인 SSM 32를 개발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당시에는 8비트 컴퓨터는 PC라 했고, 16비트컴퓨터는 마이크로컴퓨터라 했다. 그러니까 슈퍼미니급인 중형컴퓨터의 개발을 생각하기에는 기술수준이 너무 낮았으나,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70년대말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와 같은 개도국에서 주전산기와 같은 중대형컴퓨터를 개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런데 80년대초로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와 같은 개도국에서도 그것을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싹트기 시작했다. 컴퓨터 개발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칩(chip)과 운용체계(Operating System;OS)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이다.

컴퓨터 부품으로는 여러가지 칩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칩은 컴퓨터의 두뇌에 해당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Microprocessor)이다. 이 칩을 만드는 기술은 독자적인 기술이기때문에 남에게 알려주지도 않고 남이 베낄 수도 없었다. 때문에 IBM이나 후지쯔 등 대기업은 고유의 칩을 만들어 썼는데, 반도체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70년대 중반부터 칩만을 만들어 싸구려로 파는 회사가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시장에서 자유로이 살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 따라서 칩때문에 컴퓨터를 개발할 엄두도 못내던 회사들이 컴퓨터 개발을 꿈꾸기 시작했다.

"컴퓨터의 중요한 구성요소 중 하나가 중앙처리장치(CPU)인데, 그게 마이크로프로세서예요. 그 칩을 미국의 인텔(intel)이 74년부터 만들어 시장에 팔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중소기업체가 만든 마이크로컴퓨터가 나오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 후로 IBM이나 데크(DEC)같은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들이 컴퓨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인텔제품의 칩을 사서 만든 중앙처리장치 때문이었죠"

전자통신연구소 주전산기개발본부장 오길록의 주장이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컴퓨터구성의 핵심적 요소가 된다면 운용체계(OS)는 컴퓨터를 돌아가게 하는 기본적인 소프트웨어이다. 다시 말해 컴퓨터를 컴퓨터답게 하는 기본 소프트웨어이다. 그런데 이 시스템은 워낙 복잡해서 수천명의 연구인력을 수년동안 투입해야 만들 수 있다. 때문에 컴퓨터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은 OS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사 그러한 인력을 투입하여 하나의 OS를 만든다 해도 그것과 연동하게 되어 있는 수많은 소프트웨어가 맞물려 돌아가지 않으면 컴퓨터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대형 컴퓨터 국산화의 어려움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컴퓨터업계에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졌다. 미국의 통신회사인 AT&T가 연구용으로 개발한 OS를 각 대학과 연구소에 무료로 공개한 것이 그것이었는데, 그 OS가 바로 유닉스(UNIX)였다. 이 OS는 각 대학에서 사용하고 또 세계 각국에서 쓰기 시작하면서 꽤 쓸만한 상품으로 발전했다. 그러자 유럽 여러 나라에서 앞으로 컴퓨터에 들어가는 OS는 유닉스를 쓰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IBM컴퓨터를 사용할 경우 그 OS에 맞물려 돌아가게 하려면 아무리 비싸더라도 IBM의 소프트웨어를 써야 되기때문에 고객이 컴퓨터에 물릴 수밖에 없는데, 유닉스를 OS로 채택할 경우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일반 시장(open market)에서 누구나 돈을 지불하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스템을 오픈 시스템(open system)이라 하는데, 그러한 시스템을 만들자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오픈 시스템으로 유닉스를 채택해 쓴다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UNIX OS가 그때까지는 연구용이나 교육용으로만 쓰였을 뿐, 실제로 비즈니스용으로 사용되기에는 여러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하나의 사건이 터졌어요. 미국의 실리콘 밸리에서 뉴웨이브(New Wave)라는 새로운 바람이 불면서 고무적인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샌 프란시스코와 보스턴에 있는 두 실리콘 밸리에서 수십개의 모험기업이 탄생하면서 인텔회사의 칩에다 AT&T의 유닉스를 개량한 운용체계를 집어넣은 중형컴퓨터를 내놓기 시작했죠. 그들 뉴웨이브 제품은 연구용이라는 유닉스의 단점을 보완해 새로운 기술을 집어넣은 것으로서 유닉스제품도 비즈니스용으로 가능하다는 새로운 인식을 심어 주었죠. 따라서 행정전산망사업에도 기존 유닉스에 근거한 개량된 OS를 사용하면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죠"

백인섭소장의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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