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살롱] 최석산 서울종합터미널사장

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던 폴 고갱은 미술을 시작하기전 직업이 증권중개인이었다. 다만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너무 탁월해 성공한 전직금융인이었다는사실이 묻혀버렸을 뿐이다. 세계적인 정치가로 잘알려진 처칠 수상 역시 정계에서 은퇴한 후 문학에 손을 대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는 문호로 큰 성공을 거뒀다.

이밖에 전설속의 도시 폼페이를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은 실업가로서 인생의 황금기에 걷던 길과는 상이한 분야에 도전해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기록된 사람이다.

서울종합터미널의 경영을 맡고 있는 최석산 사장 역시 제2의 인생을 개척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예비역 육군 소장인 그는 기업체 사장으로 변신했다가 컴퓨터프로그래머로, 다시 학원강사로 도저히 연관짓기 어려운 끝없는 탈바꿈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최사장은 육사 12기출신으로 젊음과 인생을 군대에 바친 전직 직업군인.

그는 「장군의 꽃」이라는 육군의 보병사단장을 역임한 후 지난 83년 예편, 현재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사장으로 재직중인 경영인이다. 최사장은장군으로서의 활약상은 물론 직장에서는 전문경영인, 학원가에서는 클리퍼분야의 명강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83년 서울종합터미널사장취임이었다.

『지금은 교통체증으로 터미널 이전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 부근은 허허벌판이었습니다. 자가용 승용차가 거의 없던 그때 고속버스가 인력수송에서는 절대적이었고 종합터미널의 입지문제가 거론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외부환경만큼이나 사무환경도 열악해 매표관리나 매출집계등을 모두 수작업에 의존함으로써 직원들이 겪는 어려움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문에 전산화의 필요성을 일찍 자각했습니다.』

최사장과 컴퓨터의 「짧지만 긴」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는 부임직후당시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서울종합터미널허가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자마자 서울의 한 컴퓨터교육기관을 찾아 전산분야를 이수했다.

평생을 군대에서 보냈고 장군의 지위에 올랐던 사람이 아들뻘되는 학생들과 그것도 당시로서는 최첨단이라고 불리던 프로그래밍을 배우는 것이 결코쉽지는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회사와 집을 오가는 것외에는 컴퓨터에 붙어살았다고 해도 될정도로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교과과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수강생의 반수정도가 중도탈락했던 프로그래밍과정이었습니다. 주로 밤시간과 새벽(4시30분 출근)에 컴퓨터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이같은 정열은 마침내 장성출신의 최사장이 스스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게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첫 작품은 로터스로짠 업무양식. 로터스가 제공하는 매크로나 함수를 이용한 간단한 양식으로PC보급이나 소프트웨어환경이 열악하기 짝이 없던 그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버스티켓의 판매와 집계는 물론 고속버스회사와의 결산 등이 하루단위로이루어져야하는 고속버스터미널의 업무특성때문에 로터스의 워크시트양식은업무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업무가 대폭 간소화되고 사무실내의 환경도 상당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버스회사와의 정산업무도 편리해져 당시로서는 전산화의 효과가 대단했었다고한다.

특히 발권업무가 이루어지는 40여개 창구를 노벨 넷웨어로 묶은 네트워크발권업무 프로그램은 수시로 변하는 매표상황 파악에 결정적 도움을 줘 최사장이 개발한 프로그램중 최고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그것은 포트란시절에 로터스와 dBASE·클리퍼 등 각종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을 학습하면서 최사장이 얻은 노하우의 산물인 셈이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전산화과정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던게 사실이다. 도입초기만해도 컴퓨터에 대한 마인드가 생기지 않아 컴퓨터를 배척하는 직원들이 많았다.

『「컴퓨터 없이도 잘해왔는데···」라는 생각 혹은 「전산화로 일자리를 잃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직원들이 전산화를 꺼리는 가장 큰 요인이었습니다.』

사장이 프로그래밍한 소프트웨어에 컴퓨터가 계산하는 결과치를 맹신하는풍조도 문제로 거론됐다. 중간관리층의 업무가 무척 피동적으로 변하는 것이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컴퓨터에 대한 「무지」가 심각했다. 이 때문에 한동안은 사장과 말단직원만이 업무에 능통하게 되는 「이상한 현상」을 경험해야했다고 한다.

최사장은 일정규모이내의 업체에서는 별도의 전산실을 두지않는다는 것을지론으로 현재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모든 업무가 전산실로 집중돼 업무협조가 잘 되지않고 피동적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직원들이 전산환경에 적응하게 되기까지 과도기를 겪었다.

이제는 터미널내의 경비를 맡고 있는 경비원들까지도 발권업무를 도울 수있을 정도로 직원들의 전산화교육이 내실을 다지고 있는 상황이다.

최사장이 학원강사로 입문하게 된 시기는 dBASE에서 클리퍼로 작업환경을 바꾼 90년대초였다.

『8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전산분야는 메인프레임환경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애플이나 삼보컴퓨터가 처음 발표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PC환경에 익숙한 저에게 PC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의 요구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처음 10여명의 인원이 사장실에 모여 PC교육을 실시하던게 발전돼 전문전산학원에서 강사로 나서게 되는 시발점이 됐다.

『어렵게 PC를 배웠기 때문에 그간 도움을 준사람들에게 봉사한다는 의미로 강사료를 받지않고 출강했습니다. 비교적 일찍이 PC에 입문했기 때문에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최사장은 학원가에 이름이 알려지면서 낮에는 종합터미널사장으로,밤에는 학원강사로 엄청나게 바쁜 시간을 보냈다.

『컴퓨터 덕분에 생긴 목디스크때문에 현재는 강사활동을 그만둔 상태입니다. 그동안 병원신세를 두번씩이나 져야했습니다. 또 신축공사에 들어간 터미널청사문제로 시간을 낼 수 없다는 점도 강사를 그만두게 된 동기입니다.』 현재 최사장은 내년말 완공을 목표로하고 있는 지상 28층, 연건평 10만평규모의 종합터미널 신축공사로 또하나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백화점과 터미널·호텔을 하나로 묶은 「Central City」, 즉 사회활동의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주상복합빌딩 완공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다.

『타자기로 보고서 양식을 깨끗하게 작성하기 위해 타자수를 고용하는 것은 경영상 명분이 없습니다. 타자수를 고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부가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산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업무를 빠르고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도구일 뿐 업무에 장애를 가져온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즉 사무원이 자유롭게 타자기를 활용하듯 전산요원없이 사무원들이 업무에 활용할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전산화라 할 수 있습니다.』

하루 유동인구 10만명인 서울종합터미널의 전산화를 일궈낸 「장군」출신최사장의 전산에 대한 지론이다.

〈이규태기자〉

최석산사장 약력

1935년 서울 출생

1956년 육군사관학교 12기 졸업

1983년 육군 소장 예편

1983년현재 서울종합터미널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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