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11)

후지쯔냐 ITT냐 77년에 접어들면서 전자교환기의 도입체제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전자교환기 도입에 관한 주요 정책을 결정할 기구로 이미 TDTF가 설치돼 있었고, 기술 개발을 담당할 기구로 전자통신연구소가, 조립 및 생산을 전담할 회사로 한국전자통신 주 이 설립되었다. 그런데다 이 사업의 주무 부처인 체신부가 그때까지의 피동적인 자세를 벗어나 주도적인 입장으로 전환했다. 따라서 이제 남은 일은 도입 기종으로 어느 회사 제품을 선정하느냐는 것이었다.

경상현을 중심으로 한 태스크포스는 76년말에 해제되었다. 그러나 기종 선정 등 어려운 작업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실무작업을 담당할 기구가 필요 했다. 이러한 실무작업을 담당할 기구로 협상단과 전담반이라는 두 개의 임시조직이 만들어졌다.

77년 1월에 구성된 협상단은 이경식 체신부차관을 단장으로, 경상현 전자통 신연구소 부소장을 실무책임자로 하고, 그 밑에 계약전문 변호사, 기술검토 반, 경제분석반, 운용반, 생산업체 대표및 행정지원반을 두었는데, 체신부와 연구소 직원 외에도 변호사와 생산업체의 대표, 경제기획원.상공부.과학기술 처의 파견관 등 각계의 전문가 35명으로 구성되었다. 협상단의 주요 임무는 입찰에 응한 외국의 교환기 생산업체와 교환기 도입에 관한 각종 조건을 협상하는 것이었는데, 그 결과를 TDTF와 경제장관협의회에 보고했다.

그 무렵 체신부는 비공식기구인 전자교환기 도입전담반을 구성하여 전자교환 기 도입에 다른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고 협상단의 업무를 지원케 했다. 성 북전화국장 정도길을 반장으로 하여 13명의 체신부 직원으로 구성된 전담반 에 구체적으로 부여된 임무는 협상단에 참여하여 인원 훈련, 치국계획 등으로 전자교환기의 수용 태세를 갖추는 한편 KIST부설 전자통신연구소의 인수 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전자교환기의 도입이 정부 방침으로 확정됨에 따라 협상단은 이미 응찰한 5개 회사에 2월 15일을 마감 기한으로 하여 추가 입찰안내서를 발송했다. 1차 입찰의 결과로는 기술도입 조건 등 불분명한 점이 많기 때문에 추가 입찰을 실시했던 것이다.

"박대통령이 지시한 기술 도입과 관련해서 기술 전수 조건 등이 입찰서에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입찰에 응한 회사들과 사전에 협의를 해서 추가 입찰을 실시하게 되었던 거죠." 협상단 실무 책임자 경상현의 이야기였다.

추가 입찰안내서를 발송한 5개 회사 중 GTE를 제외한 4개 회사가 입찰에 응했는데 그들의 입찰서와 사업계획서를 검토한 끝에 일차적으로 지멘스를 탈락시켰다. 후지쯔와 ITT, NEC는 비교적 충실한 자료를 제출했으나 지멘스는그 내용이 부실했던 것이다.

정부는 협상 대상을 3개 회사 중 2개 회사로 압축하기로 하고 각 회사의 계획을 기술.운용.경제성 등 세가지 측면에서 검토했는데, NEC가 다른 두 회사 에 비해 낮은 점수로 나타나자 협상 대상을 후지쯔와 ITT로 좁혔다. 그런데N EC는 처음부터 후지쯔를 돕기 위해 찬조출연을 했다는 설도 있었다.

77년 3월 후지쯔의 FETXX 100L과 ITT의 M10CN 기종 중 하나를 선택하기로 한 경제장관협의회의 결정에 따라 보다 정밀한 실사를 위해 협상단의 실무진 을 두 회사의 생산공장이 있는 일본과 벨기에 현지로 파견했다. 기술 검토를 맡은 안병성과 경제성 분석을 맡은 유성재가 중심이 된 협상단은 4월 10일부 터 40일 동안 두회사의 본사와 부품공장들을 두루 둘러보며 그들의 생산시설 조립용 자재, 교환기, 원가분석, 로열티 지불조건, 국산화율의 보장정도등을 면밀히 조사했다.

현지실사를 마친 협상단은 77년 6월부터 두 회사와 본격적인 협상을 실시하여 가격과 기술 전수 조건 등을 구체화한 다음 그해 9월에 그 동안의 협상 결과를 요약한 보고서를 만들어 체신부에 제출했고, 체신부는 이를 다시 경 제장관협의회에 상정했다. 이 보고서에는 교환기의 성능, 국산화계획, 경제 성 등 두 회사 제품에 대한 대비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는데, 성능 및가격에 있어서는 후지쯔가, 국산화계획에 있어서는 ITT가 우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9월 17일에 개최된 경제장관협의회는 첫째, ITT에서 도입되는 기계시설 부품 및 수입 교환기의 가격을 최종적으로 최대한 인하토록 협상하고 둘째 도입될 반도체기술의 내용과 조건 등을 충실화한다는 조건을 붙여 ITT를 선정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성능 및 가격면에서 후지쯔가 우위에 있으나, 이는 현재 기대할 수 있는 최저가격이며, 국산화계획의 차질없는 성취로써만 실현가능한 것이다.

둘째, 국산화계획 전망 측면에서 볼 때 ITT가 우위에 있다. 후지쯔의 경우수출과 기술 전수의 경험이 없고, 후지쯔의 기종은 현재까지 표준기종으로 채택된 예가 없으며, 후지쯔의 기종을 생산할 전용공장은 건설된 예가 없다.

셋째, 전자공업 전반에의 파급효과면에서 ITT가 우위에 있다. 전자공업 발전 에 있어서 핵심인 반도체기술은 후지쯔가 상대적으로 저수준에 있고, 반도체 기술만을 별도로 도입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넷째, 좀더 안전하고 확실성 있는 국산화계획의 달성이 가능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섯째, ITT에서 도입되는 기계시설, 부품 및 수입 교환기 가격은 추가협상 에서 좀더 인하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70년대 초부터 논란을 거듭했던 전자교환기 도입 문제는 일단락되었으며 도입 기종은 미국의 다국적기업인 ITT의 벨기에 현지법인인 BTM에서 생산하는 공간분할방식인 M10CN 기종으로 확정됐다.

그렇다면 왜 정부는 성능이 우수하고 가격이 저렴한 후지쯔 제품을 젖혀놓고ITT의 제품을 선택했을까? 경제장관협의회가 발표한 대로 기술 전수를 그렇게 중요한 조건으로 생각했을까? 그 밖에 어떤 정치적인 배경은 없었을까?그 당시 실무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순전히 체신부와 협상단이 중심이 돼서 결정했을 뿐 정치적으로 결정됐던 것은 아니에요. 그거 하나만은 확실해요." 전담반장으로 협상단에 참여했던 정도길의 주장이었다.

"실무자 입장에서는 기술이라는 단순경제성에서 볼 때 일본 후지쯔 제품이 M10CN보다 훨씬 낫다고 판정했는데, 2차적인 경제성으로 볼 때 4차5개년계획 이 시작된 그 당시는 전자공업 육성이 지상 명제로 떠오르던 때였어요. 따라서 정부 고위층 인사들은 전자교환기 도입을 통신의 현대화 측면보다는 전자 공업 기반 조성 측면에서 더 강조했어요. 박대통령도 우리나라 전자산업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 기술 전수를 어떻게 받아야 하느냐 하는 시각에서 두 회사를 다시 한번 불러서 따져보라는 말씀도 하셨구요. 그런 시각에서 M10CN 이 결정됐던 겁니다.

후지쯔측에서는 기술을 전혀 못주겠다고 했어요. 그들이 내세운 핑계로는 기술이 자기네 것이 아니라는 거였어요. 그들 얘기로는 그들 기술은 NTT의 것이고 NTT의 기술은 미국의 벨연구소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네들 마음대로 줄수 없다는 것이었죠. 결국은 기술 이전 문제로 결말이 났어요."협상단의 실무 책임자였던 경상현의 주장이었다.

"FETEX 100L이라는 기종은 후지쯔가 전자교환기 계열 작품으로는 초창기에내놓은 작품이었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TDX 1에 해당한 거죠. 따라서 기술이전 경험도 없는데다 그 기종 자체가 상당부분 필드 테스트도 이뤄지지않았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기술이전을 생각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협상단의일원이었던 유성재가 덧붙였다.

어쨌든 전자교환기의 기종결정을 전후하여 그것을 수용하기 위한 몇가지 제도적인 보완작업이 이루어졌다. 우선 체신부의 수용태세가 강화되었다. 77년 7월에는 전자교환기 관련업무의 전담기구로 체신부내에 기술정책관실이 설치되었고 그 책임자로 정도길이 임명되었다. 이에 따라 임시기구로 설치되었던전자교환기도입전담반은 해체되었고, 이때부터 체신부가 주체적으로 전자교 환기사업을 주도해 나갔다.

그와 동시에 전자통신개발추진위원회(TDTF)의 기능이 대폭 강화되었다. 76년 에 발족한 TDTF는 법령의 뒷받침이 없는 비공식기구에 불과했는데, 77년 11 월 15일 전자통신개발추진위원회설치령이 공포됨에 따라 법정단체로서 새로 출범함과 동시에 강력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 설립 목적에서 볼 수 있듯이 전자교환기 도입에 관한 제반사항을 효과적 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체신부장관 소속하의 중앙행정기관인 위원회로서 출범 한 TDTF는 전자교환기 도입 및 개발사업에 대해 외국기업과 총괄계약까지 체결하는 기구로 발돋움했다.

따라서 위원회의 구성도 격상됐는데 위원장에는 체신부장관이, 위원에는 경제기획원차관.재무부차관.상공부차관.과학기술처차관.조달청장 등이 당연직 으로 포함되었고, 간사는 체신부 기술정책관이 맡았다.

"위원회라 하면 대개 자문기관이었는데, TDTF는 의결기관이었어요. 그 당시대한민국에 의결기관인 위원회가 두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TDTF였죠."TDT F의 발족 당시부터 실제로 간사 역할을 맡다가 나중에는 기술정책관으로승진 하여 정식간사가 되었던 정도길의 이야기였다.

연구소에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76년 12월말에 발족한 KIST 부설 전자통 신연구소는 추후에 체신부 산하의 연구기관으로 다시 설립한다는 전제하에 설립되었고, 이듬해 1월에 구성된 전자교환기도입전담반의 주요임무 중의 하나가 연구소의 인수준비라는 것은 기술한 바 있다.

그러한 각본에 따라 77년 3월 이 연구소는 특정연구기관육성법에 의해 특정 연구기관으로 지정받아 체신부로부터 출연에 의한 예산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그후 단계적으로 체신부 산하의 독립된 연구기관으로의 설립절차를 밟아그해 12월 10일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라는 이름으로 새로 출발했다. 정 만영 소장 이하 세명의 부소장에는 변동이 없었으며, 연구소 위치는 광화문 우체국 청사내였다.

KIST에서 체신부 산하로 적을 옮긴 통신기술연구소는 통신기기 및 통신망 관련 기술의 연구개발이라는 본연의 임무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맡게된다. 싱크탱크로서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화 적체라는 너무나도 버거운 사업기능에 눌려 정책다운 정책을 펼치지 못하고 있던 체신부 입장에서 연구소 젊은 엘리트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는 청량 제 역할을 했다. 그들은 통신사업의 장기비전을 제시하고 중요한 정책결정에 있어 이론적인 배경을 제공해 줌으로써 뒷날 통신사업의 비약적 발전의 토대 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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