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선] '퍼스트 무버' 제네시스의 시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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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봉균 기자

완성차 업체의 신차 기술 발표회는 대개 결점 없는 성공 신화로 채워진다. 화려한 수식어와 장밋빛 스펙, 경쟁 모델을 압도했다는 데이터가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이 관행이다. 그러나 최근 열린 제네시스 GV90 기술 설명회의 공기는 사뭇 달랐다. 연단에 오른 연구개발(R&D) 실무 책임자들의 입에서 가장 먼저 쏟아져 나온 단어는 뜻밖에도 '실패'와 '시행착오'였다.

제네시스가 '퍼스트 무버(First Mover)'의 반열에 올라섰음을 가장 확연하게 보여준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이처럼 '실패의 궤적'을 당당히 고백하는 대목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자동차 산업을 지배한 문법은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였다. 메르세데스-벤츠와 BMW가 닦아놓은 기술적 해법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추격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었다. 벤치마킹 대상이 분명했던 시절에는 실패를 길게 이야기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물리적 검증을 끝낸 '정답지'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GV90은 달랐다. 3톤에 육박하는 초대형 전기 SUV에서 B필러를 과감히 들어내고, 앞뒤 문이 서로 간섭 없이 독립적으로 여닫히는 코치 도어는 글로벌 럭셔리 시장의 어떤 선도 브랜드도 양산차로 시도하지 못한 미답의 영역이었다.

따라갈 벤치마크가 사라진 순간, 엔지니어들은 대학교 기구학 교재를 다시 펴고 가구 박람회와 로봇 공작기계 공장을 뒤져야 했다. 정답이 없는 길에서 첫 번째 시험이 실패로 끝난 것은 부끄러운 과오가 아니라, 오직 선도자만이 치를 수 있는 필연적인 통과의례였다.

'워낙 파격적인 방식인데, 중국 업체들이 이 힌지 구조를 금방 모방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대한 엔지니어들의 답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 슬라이딩과 스윙을 동시에 구현하는 특허망도 촘촘하지만, 핵심은 '구조의 모방'이 아닌 '양산 제조 품질의 벽'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5년 이내에는 제네시스 GV90에 적용된 기술을 따라올 수 없을 것으로 자신했다.

경쟁사들이 도어 부품 몇 개를 뜯어보고 역설계해 작동 시제품을 흉내 내는 것은 수년 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70㎏에 달하는 육중한 도어를 매달고도 0.3㎜ 수준의 초정밀 공차를 유지하며, 수만 번을 여닫아도 단차가 생기지 않도록 대량 생산 라인에 안착시키는 '제조 품질 노하우'는 전혀 다른 영역이다.

전복 사고 시 지붕이 14톤의 하중을 버티도록 롤케이지와 도어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구조적 결벽증은 단순히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하거나 거대한 디스플레이를 단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최근 전기차 시장은 '바퀴 달린 스마트폰'이라는 담론에 매몰돼 있다. 화려한 사용자경험(UX)과 가성비가 모든 것을 대체할 것처럼 떠들썩하다. 하지만 소비자가 차 문을 여닫을 때 손끝으로 느끼는 묵직한 조작감, 잡소리 하나 허용하지 않는 차폐감, 사고 순간 승객의 생명을 지켜내는 골격의 강성은 여전히 가혹한 물리 법칙의 영역이다.

실패한 금형을 폐기장으로 보내고, 시험차를 일반 신차보다 세 배나 더 부숴가며 얻어낸 데이터는 결코 단기간에 코딩만으로는 베낄 수 없는 제네시스만의 진짜 '해자(Moat)'다.

1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유럽 명차들의 헤리티지는 결코 완벽함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세상에 없던 기술을 밀어붙이다 겪었던 수많은 시행착오와 엔지니어들의 집념이 켜켜이 쌓여 그 브랜드만의 격이 된다.

실패를 감추지 않고 온전히 드러낼 만큼 제네시스는 성숙해졌다. '기술로 완성한 새로운 장인정신'은 그렇게 실패의 파편 위에서 조용히 피어나고 있다. '퍼스트 무버' 제네시스의 진짜 시간이 이제 시작됐다.


함봉균 기자 hbkon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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