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신뢰가 만든 새 이름 '에이처' [이금준의 담다디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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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이처 소속 아티스트.

모델이 예능에 나오는 게 낯설던 시절이 있었다. 런웨이 위의 얼굴은 말이 없어야 했고, 화보 속 표정은 멀리 있어야 했다. 옷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이 모델의 일이었고,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건 그 일의 바깥에 있었다.

그 거리를 좁힌 이름들이 한혜진, 이현이, 송해나였다. 이들이 방송에서 털털하게 웃고 거침없이 수다를 떠는 사이, 시청자는 화보 너머의 사람을 알게 됐다. 큰 키와 날 선 이목구비 뒤에 숨어 있던 엉뚱함과 솔직함이 화면 밖으로 쏟아졌다. '모델테이너'라는 말은 그렇게 하나의 장르가 됐다.

그 장르가 이제 새 문을 연다. 지난 7일 신생 엔터테인먼트사 에이처(acher)가 이혜영, 한혜진, 이현이, 송해나, 김진경, 김성희, 고소현, 이세한과 전속계약을 맺고 출범을 알렸다. 회사를 이끄는 사람은 현수진 대표다.

현 대표의 이력은 모델테이너의 역사와 고스란히 겹친다. 1999년 모델 매니지먼트에 발을 들인 그는 2010년 에스팀에 합류해 대표까지 지내며 모델들이 무대 밖으로 걸어 나오는 길을 함께 닦았다. 모델이 예능에 나가는 것 자체가 모험이던 때였다. 화면 속 이들의 자연스러운 모습 뒤에는 그 가능성을 먼저 알아본 눈이 있었다.

매니지먼트는 결국 사람의 일이다. 계약서는 기간을 정하지만, 함께 버티는 시간은 신뢰가 정한다. 연예계를 오래 취재하다 보면 화려한 성공담보다 그 뒤에서 묵묵히 일정표를 짜고 기회를 물어 오는 이들의 존재가 더 크게 보일 때가 있다. 아티스트가 슬럼프를 지날 때 곁을 지키는 사람, 남들이 아직 보지 못한 가능성에 먼저 판을 깔아 주는 사람. 좋은 매니저는 대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

에이처라는 이름을 눈여겨보게 되는 것도 그래서다. 에이처는 'Artist'와 'Cherish'를 합친 말이다. 아티스트를 소중히 여기는 데서 좋은 매니지먼트가 출발한다는 철학을 이름에 새겼다. 흔한 구호처럼 들릴 수 있지만, 20년 가까이 한 사람과 일해 온 아티스트들이 함께 새 출발을 택했다는 사실이 그 말에 무게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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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이처 소속 아티스트와 현수진 대표.

아티스트들의 첫 인사에도 그런 온기가 묻어난다. 이현이는 "오랜 시간 함께한 에스팀 엔터테인먼트와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에이처와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었다"며 그간의 인연에 감사의 인사를 남겼다. 한혜진은 "20년 가까이 함께했던 현수진 대표님과 새로운 마음과 다짐으로 열심히 달려보려고 한다"고 했다.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질 때도, 홀로 감내해야 하는 시간도 있었다고. 그때마다 곁에서 응원해 준 대표와 동료들이 있었기에 이번 동행이 더 반갑다고 진심을 전했다. 지나온 시간을 고마워하면서 앞으로를 다짐하는 문장들이다. 이별의 아쉬움보다 출발의 설렘이 크게 읽힌다.

라인업도 흥미롭다. 오랜 시간 사랑받아 온 이혜영부터 예능과 유튜브를 넘나드는 한혜진, 이현이, 송해나, 그리고 다음 세대를 이끌 얼굴들까지 한 회사에 모였다. 경력도, 활동 무대도 제각각이다. 그 다양함이 곧 에이처가 앞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스펙트럼의 폭이기도 하다.

기대가 커지는 건 에이처가 그리는 그림 때문이다. 회사는 매니지먼트·패션·방송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아티스트마다 결이 다른 전략을 짜겠다고 밝혔다. 분야를 넘나드는 활동 기회를 찾아 각자의 브랜드를 넓혀 가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데뷔 27주년을 맞은 한혜진, 20년을 넘긴 이현이처럼 오래 달려온 이들에게는 다음 챕터를, 이제 막 이름을 알리는 이들에게는 첫 챕터를 함께 써 줄 회사가 생겼다.

엔터테인먼트 환경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방송과 화보가 전부이던 시절을 지나, 이제 아티스트 한 사람이 채널이 되고 브랜드가 되는 시대다. 모델의 자리도 런웨이와 지면을 넘어 콘텐츠와 비즈니스 전반으로 넓어졌다. 변화의 첫 장면을 함께 만들었던 사람들이 그다음 장면을 어떻게 그려 낼지, 에이처의 출범이 반가운 이유다.

모델테이너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그랬다. 처음엔 낯설었고, 곧 익숙해졌고, 결국엔 당연해졌다. 그 흐름을 만들었던 이들이 다시 한자리에서 출발선에 섰다. 이번엔 또 어떤 '당연한 장면'을 만들어 낼지 지켜볼 일이다.

현수진 대표는 "아티스트가 자신의 가능성을 더욱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함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든든한 파트너가 되겠다"고 말했다. 오래된 신뢰 위에 지은 새집이다. 그 집에서 나올 이야기가 벌써 궁금하다.


이금준 기자 (auru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