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그룹에게 힙합은 오랫동안 '갈아입는 옷'이었다. 강한 비트와 랩 파트, 거친 스타일링을 앞세운 '걸크러시' 콘셉트는 한 시즌을 장식한 뒤 다음 앨범에서 청량함이나 몽환에 자리를 내주곤 했다. 장르가 팀의 정체성이라기보다 시즌 기획에 가까웠던 셈이다.
랩 역시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많은 걸그룹에서 랩은 곡의 분위기를 바꾸는 짧은 구간, 이른바 '랩 파트'로 존재했다. 멜로디 중심의 노래 사이에 끼워 넣는 장치였을 뿐, 곡을 이끄는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영파씨(YOUNG POSSE)는 이 공식을 따르지 않은 드문 팀이다. 2023년 'MACARONI CHEESE'로 데뷔할 때부터 올드스쿨 힙합을 출발점으로 삼았고, 이후 장르의 폭을 넓히면서도 중심축은 옮기지 않았다. 지난 7일 공개한 디지털 싱글 'GO해 (GO AHEAD)'는 그 고집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키는 작품이다.
◇ 무게 대신 재치
힙합 걸그룹이라고 하면 흔히 '센 척'과 '무게'부터 떠올린다. 영파씨의 방식은 반대에 가깝다. 이들은 힙합을 위압의 도구가 아니라 놀이의 언어로 다룬다. 멤버마다 랩의 결과 말투가 뚜렷하고, 그 차이가 곡 안에서 부딪히며 웃음과 리듬을 만든다. 힙합의 핵심이 자기 이야기를 자기 목소리로 하는 데 있다면, 영파씨는 장르의 포장지를 내세우기보다 그 알맹이를 먼저 신경 쓴 팀이다.
이 유쾌함은 진입 장벽을 낮추는 역할도 한다. 힙합에 익숙하지 않은 청자에게 묵직한 붐뱁 비트는 낯설게 들릴 수 있다. 영파씨는 그 낯섦을 재치 있는 말맛과 캐릭터로 풀어낸다. 장르의 문법은 지키되 문턱은 낮춘 셈이다.

'GO해'의 메시지도 같은 선상에 있다. 정답을 찾느라 시간을 쓰기보다 일단 움직이고, 틀리면 다시 하면 된다는 것이다. '고민할 시간이 아까워 GO해', '기회는 알람 없이 오니 GO해' 같은 가사는 가볍게 들리지만, 유행하는 콘셉트 대신 낯선 길을 택해 온 팀의 이력과 겹치며 설득력을 얻는다. 노래가 팀의 자기소개처럼 들리는 이유다.
◇ 1990년대 브루클린을 향한 사운드
사운드는 뿌리 쪽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갔다. 'GO해'는 1990년대 초반 뉴욕 브루클린 거리를 떠올리게 하는 빈티지한 질감과 묵직한 비트를 중심에 뒀다. 샘플링과 드럼 루프를 바탕으로 한 붐뱁이 힙합의 중심에 서 있던 시기다. 소리를 덜어낸 비트 위에서 다섯 멤버의 목소리가 주고받기를 이어가고, 반복되는 'GO해' 훅이 곡 전체를 한 방향으로 밀어붙인다.
화려한 편곡으로 빈틈을 메우는 대신 랩과 호흡만으로 곡을 끌고 가겠다는 선택이다. 비트가 단순할수록 래퍼의 발성과 박자감, 단어 선택이 그대로 드러난다. 숨을 곳이 없는 구조다. 장르에 대한 자신감 없이는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고, 그 결정이 곡의 매력이 된다.

◇ '귀하다'는 말의 무게
영파씨를 두고 '귀한 팀'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건 단순히 실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가요계에서 한 장르를 팀의 정체성으로 끝까지 밀고 가는 걸그룹은 손에 꼽기 때문이다. 트렌드가 짧은 주기로 바뀌고 매 컴백이 성적으로 평가받는 구조에서는 유행에 맞춰 옷을 갈아입는 편이 안전하다는 문법. 영파씨의 선명함은 그 공식을 일부 내려놓은 대가로 얻은 것이다.
그 대가는 다른 형태의 기대로 돌아온다. 콘셉트가 바뀔 때마다 팬은 새 모습에 적응해야 하지만, 정체성이 분명한 팀의 컴백은 '이번에는 어떻게 풀었을까'라는 궁금증을 남긴다. 무엇을 할지가 아니라 어떻게 할지를 기다리게 만드는 힘이다.
물론 고유한 색깔이 곧 대중적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한 장르에 머무르면 확장이 더딜 수 있고, 익숙해진 방식이 반복되면 신선함도 옅어진다. 영파씨 앞에 놓인 과제도 여기에 있다. 다만 비슷한 콘셉트가 반복될수록 시장은 다른 소리를 내는 팀을 기억한다. 영파씨가 쌓아 온 것은 바로 그 기억과 기대의 자리다.
영파씨의 'GO해'는 그 자리를 한 뼘 더 넓히는 곡이다. 고민보다 실행을 외치는 노래처럼. 이들이 다음에는 어떤 방식으로 걸그룹 힙합의 경계를 밀어낼까. 역시 기다리는 맛이 있는, '귀한 팀'이다.
이금준 기자 (auru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