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F 스타트업 이야기] 〈98〉영수증 정산에서 지속 가능한 자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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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진 글로벌청년창업가재단 사무총장·경영학 박사

10월이 오면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복도는 피감기관들이 실어 나른 수백개의 상자로 발 디딜 틈이 없어진다. 의원실 캐비닛은 빽빽한 숫자가 적힌 예산안과 감사 자료로 턱 끝까지 찬다. 국회 보좌진으로 밤을 지새우던 시절, 두툼한 서류철을 넘길 때마다 뼈아프게 마주했던 것은 바로 '행정의 역설'이었다.

국정감사장에서는 매년 같은 호통이 반복된다. “수조원의 나랏돈을 쏟아부었는데 왜 지속 가능한 성과는 나오지 않는가?” “청년 창업가와 풀뿌리 복지 현장은 왜 만성적인 데스밸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호통의 뒤편에는 '투입 지표'와 '영수증 정산'에 매몰된 관료주의가 버티고 있다. 정부는 디지털화를 끝냈다고 큰소리치지만, 현장은 모니터 앞의 데이터 입력과 책상 위의 종이 풀칠을 동시에 감당하는 이중고에 갇혀 있다. 전산망에 지출 내역을 입력하고도, 훗날 들이닥칠 감사를 의식해 영수증 원본을 복사하고 A4 용지에 줄 맞춰 오려 붙이는 낡은 관행 탓이다. 창업가들은 시장을 개척할 시간에 책상머리에서 풀칠을 하고, 복지사들은 연말마다 개인 식별 번호를 대조하며 우편을 발송하느라 아이들의 눈을 마주할 시간을 빼앗긴다.

부정 수급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이 '불신과 통제'로 변질된 것이다. 극소수의 부정을 막겠다고 세운 감시초소가 성실한 다수를 질식시키는 전형적인 '통제 비용의 역설'이다.

정부 보조금은 기본 운영비를 메우기에도 헐떡이고 민간 모금의 벽도 높다. 대형 포털이나 기업 재단의 모금함은 입점 문턱이 높고, 어렵사리 채택되어도 곧 메인 화면 뒤로 밀려난다. 후원을 받더라도 거대 플랫폼이 기부자 데이터를 독점하기에, 시설은 도운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영원한 '플랫폼의 하청 기지'로 남는다.

국회의 캐비닛을 덮고 현장으로 돌아와 마주한 해답은 명확했다. 단발성 시혜나 사후적 감시가 아니라 스스로 일어설 '자립의 근육'을 길러주는 생태계적 접근이다. 영리 스타트업의 검증된 기술과 제도를 비영리 현장에 이식해야 한다.

첫째, 이미 마련된 인프라를 연결해 '무늬만 디지털화'를 끝내야 한다. 국세청 전자기부금영수증 제도는 연말정산 간소화 자동 연동과 서식 제출 면제라는 혁신을 이뤘지만, 영세 복지시설은 법적 문턱 탓에 접속조차 못 한다. 인가 요건을 합리화하거나 준회원 등록제를 도입해 사각지대를 메우고 핀테크를 결합해 종이 풀칠 행정을 걷어내야 한다.

둘째, 거액 후원 대신 일상의 소액 연대를 구조화해야 한다. 세액공제를 신청하지 않는 소액 기부는 복잡한 식별 번호를 수집할 필요가 없다. 이 장벽을 허물면 주민 누구나 1000원 단위로 동참하며, 행정 비용을 줄인 생활 밀착형 나눔 문화가 자리 잡는다.

셋째, 현장의 데이터 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플랫폼 종속에서 벗어나 후원자와 직접 소통할 독립 거점을 갖출 때 '초기 진입→관계 형성→완전 자립'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작동한다.

물론 디지털 도구를 쥐여준다고 난제가 하루아침에 풀리지는 않는다. 소액 후원 모델의 안착을 위한 사회적 인내와 디지털 취약 계층을 향한 세심한 오프라인 지원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관치의 굴레에 갇힌 획일적 보조금 행정보다 스스로 서게 돕는 시스템이 훨씬 지속 가능하다.

올해 정기국회도 예산 증감을 두고 치열한 샅바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정책의 본질은 '얼마를 더 내려보낼 것인가'가 아니라 현장이 스스로 생존할 '자생적 생태계의 힘'을 길러주고 있는가에 있다.

정부와 국회의 역할은 종이 영수증을 뒤적이는 감시관이 아니라, 혁신의 도구를 쥐여주고 함께 달리는 페이스메이커다. 영수증 정산이 아닌 사회적 가치 창출로 자립하는 풀뿌리 조직들이 일어설 때 대한민국의 미래 예산은 비로소 온전한 결실을 맺을 것이다.

김병진 글로벌청년창업가재단 사무총장·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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