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는 11월, 세상에서 가장 정밀한 시계가 태평양 바다를 건너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을 찾는다. 그 주인공은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의 이동형 광시계 'YbT'로, 약 86억년에 1초도 틀리지 않는 극한의 정밀성을 지닌 시계다.
이 시계는 GPS 시간을 관장하는 미국 해군천문대(USNO)에서 정밀 비교를 마쳤고, 최근에는 해발 4300m가 넘는 로키산맥 블루스카이 정상까지 올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증명하고자 고도별 미세한 시간 차를 재는 실험도 수행했다. 실험실에서 태어난 시계가 산을 오르고 바다를 건너고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풍경이 반세기 전에도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국가 차원 시간 표준이 없었다. 1975년 출범한 KRISS가 가장 먼저 매달린 숙원은 우리 손으로 지키는 '시간 주권'이었다.
KRISS는 1978년 해외 차관으로 상용 세슘원자시계 두 대를 도입했고, 바다를 건너온 USNO의 이동용 원자시계 '플라잉 클락(Flying Clock)'을 통해 원자시계를 세계협정시(UTC)에 동기화하며 비로소 독자적인 시간 주권을 갖게 됐다.
이로부터 50여년이 지난 지금, 세계 시간표준은 거대한 전환점을 마주하고 있다. 10월에 열리는 제28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는 시간 기본단위인 '초'의 재정의를 중요 의제로 다룰 예정이다.
현재의 초는 1967년 제13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결정된 세슘 원자 바닥상태 초미세 준위 사이의 마이크로파 전이선을 기준으로 정의되고 있다. 이를 통해 확립된 정밀 시간표준은 내비게이션, 전력망, 통신, 금융시장 등 현대 과학문명의 보이지 않는 근간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인류는 기존 세슘원자시계보다 100배 이상 정확한 시계를 개발해냈다. 바로 마이크로파 대신 가시광선 대역 주파수로 원자의 공명을 탐색하는 광시계다. 압도적인 정밀성을 자랑하는 광시계 덕분에 초정밀 측지, 기초 물리학 이론 검증, 암흑물질 탐색 등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다. 다가오는 2030년대에는 광시계를 기반으로 초의 재정의가 이뤄질 전망이다.
초의 재정의를 위해서는 선행해야 할 과제가 있다. 세계 곳곳에서 개발된 광시계들이 실제로 같은 주파수를 내는지 맞춰 보는 정밀 비교가 필요하다. 하지만 기존 위성 통신을 이용한 비교 방식은 광시계의 정밀도를 담아내지 못하고, 광섬유망을 이용한 비교 방식은 지리적 한계로 대륙 간 비교는 어렵다. 그래서 대륙을 가로질러 두 시계를 비교할 수 있는 '이동형 광시계'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대한민국 측정표준 대표기관인 KRISS의 국제적 위상은 확고하다. KRISS는 20억년에 1초의 오차를 가지는 대한민국 제1호 광시계 'KRISS-Yb1'을 개발했으며, 이 시계로 2021년부터 UTC 생성에 기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전 세계 광시계들 중 가장 활발히 세계협정시 생성에 기여하며 그 기술력을 세계에 증명하고 있다. 여기에 세계 최고 수준 정확도를 목표로 하는 'KRISS-Yb2'와 이동형 광시계 'KRISS-YbM1'도 개발 중이다.
이번 NIST의 이동형 광시계가 태평양을 건너오는 이유는 바로 KRISS가 개발한 광시계와 정밀 주파수 비교를 수행하기 위해서다. 48년 전 USNO의 이동형 세슘원자시계가 바다를 건넜던 것이 우리의 시간을 선진국이 만들어 놓은 시간 기준에 맞추는 것을 일방적으로 도와주기 위해서였다면, 이번은 인류의 새로운 시간표준을 함께 설계하고 검증하기 위한 동등한 파트너로서의 만남이다.
KRISS는 앞으로도 인류가 나아갈 미래 시간표준 최전선에서 글로벌 주역으로 당당히 활약할 것이다.
이원규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원자양자센싱그룹 책임연구원 oneqlee@kriss.r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