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도시 곳곳에서 재개발과 재건축이 진행되고 있다. 새로 짓는 공동주택은 앞으로 수십년 동안 사용된다. 지금 선택하는 난방과 급탕 방식, 열에너지원이 미래 도시의 탄소배출을 결정한다. 새 공동주택의 열공급 방식을 정하는 일은 설비 하나를 고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앞으로 그 도시가 어떤 에너지를 만들고, 어떻게 나누어 쓸 것인지를 함께 정하는 일이다.
건축물의 탄소중립에는 순서가 있다. 먼저 단열과 기밀 성능을 높이고 열교를 줄여 냉·난방에 필요한 에너지량부터 낮춰야 한다. 그다음 히트펌프와 열회수형 환기장치, 펌프 등에 고효율 제품을 적용해 실제 소비되는 에너지를 한 번 더 줄여야 한다. 설계단계에서 수요를 충분히 줄이지 않으면 재생에너지 설비와 기계설비의 용량만 계속 커질 수밖에 없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최근 주거용 건축물 에너지의 약 60%가 난방과 온수에 쓰이고, 그 가운데 약 78%가 도시가스 등 화석연료 기반 열에너지에 의존한다고 지적했다. 히트펌프 보급도 단열과 기밀 성능 개선과 함께 추진하고, 신축 건축물의 저탄소 난방설비 전환 로드맵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열원만 바꾸어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개별 건축물의 노력만으로 탄소중립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한 에너지를 부지 안에서 모두 생산하기는 어렵고, 재생에너지 설비를 계속 늘려 제로에너지건축물 인증 등급을 높이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난방과 급탕에 쓰이는 열이 화석연료에 머문다면 높은 등급을 받더라도 온실가스 배출은 남는다. 그래서 건축물 안에서 화석연료를 직접 태우는 방식을 줄이고, 전기 히트펌프나 집단에너지를 이용하는 구조로 바꾸어야 한다.
집단에너지망이 없는 지역에서는 개별형 히트펌프가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반면 고층·고밀 공동주택이나 활용가능한 열원이 모여 있는 지역에서는 집단에너지로 여러 건축물의 열수요를 함께 관리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다. 어느 한 방식을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보다 지역과 건축물의 조건에 따라 선택하거나 조합해야 한다.
배출 장소만 건축물에서 발전소나 열생산시설로 옮긴다고 탄소중립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전기는 재생에너지와 무탄소 전원의 비중을 높이고, 열은 하수열과 산업폐열, 소각열, 데이터센터 폐열 등 지역에서 활용할 수 있는 미활용열로 전환해야 한다. 지역의 열원과 건축물의 수요를 연결하는 열체계도 마련해야 한다. 이렇게 외부에서 공급되는 청정한 전기와 열도 실제 건축물의 탄소감축 성과로 인정되어야 전환이 빨라질 수 있다. 유럽이 '제로에너지건축물'에서 '제로배출건축물'로 정책의 목표를 옮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층·고밀 도시는 부지 안의 재생에너지만으로 한계가 있고, 기축 공동주택의 전면 전기화도 공간과 소음, 전력용량은 물론 기존 난방설비와의 연계에서도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청정열은 공급 과정에서도 낭비되지 않아야 한다. 공급온도를 낮추고 배관의 열손실을 줄이는 한편, 열교환기와 순환펌프의 효율도 높여야 한다. 에너지사업자의 청정열 전환이 건축물 소유자의 선택으로 이어지려면, 청정열 사용 성과가 제로에너지건축물(ZEB) 인증과 부동산 가치에 반영되어야 한다. 소비자도 요금과 인센티브를 통해 실질적인 혜택을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건축주와 소비자의 선택에만 맡겨서는 전환이 어렵다. 기후에너지환경부와 국토교통부를 비롯한 관계 부처가 열원의 생산과 공급, 건축물의 성능평가와 인센티브를 하나의 정책 체계로 연결해야 한다. 지금 열에너지 전환의 기준을 바로 세우지 못하면 새 공동주택의 화석연료 의존은 다시 수십 년 동안 이어질 것이다. '공동주택의 열에너지까지 디자인'하는 일은 국가가 범부처적으로 추진하고, 도시가 지역 여건에 맞게 실행해야 할 핵심 정책 과제다.
이명주 명지대 건축학부 교수·대통령직속 국가기후위기대응위원회 위원 mylovezed@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