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만 하다 취재를 당하는 기분이 어떤가요?”
2007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의 한 식당. 이상완 전 삼성전자 LCD총괄 사장의 한마디에 웃음이 쏟아졌다. 이날 만찬은 한국디스플레이학회가 세계 최대 디스플레이 학술행사 'SID 2007'에 참석한 주요 인사들을 초청한 자리였다. 대학 교수와 함께 삼성전자와 LG필립스LCD 임원 40여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적과의 동침'이었다.
저마다 들떠 있었다. 이상완 학회장의 제의로 한 사람씩 SID 현장에서 느낀 소감과 함께 건배사가 이어졌다. '디스플레이 1위'라는 단어가 종종 등장했다. 건배사 한마디에 때론 탄성이, 때론 박수와 웃음이 식당을 가득 메웠다. 마치 월드컵 우승팀의 뒷풀이 장면 같았다.
마지막에 기자에게도 한마디 권했다. 갑작스런 건배사 제의에 우물쭈물하자 “취재 당하는 기분이 어떤가요”라는 농담이 나왔다. 킥킥거리는 좌중 앞에서 떠듬떠듬 말을 이어 갔다.
“해외 나오면 애국자가 된다고 했는데 여러분이 정말 애국자인 것 같습니다. 디스플레이만큼은 우리가 세계 1위라는 것을 여기 이국땅에서 실감했습니다.”
SID 2007 현장의 강렬한 인상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한국이 세계 디스플레이 산업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학술논문은 양과 질에서 일본, 중국을 압도했다. 한국 기업 부스에 전시된 세계 최초의 OLED, 플렉서블 디스플레이, 3D 패널을 보려는 이방인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가는 곳마다 VIP로 대접받는 기분이었다. '코리아 프리미엄'에 우쭐해지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2005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 디스플레이 국가가 된 한국은 그야말로 기세등등했다. 기자가 던진 건배사는 이랬다.
“영원한 디스플레이 최강국, 앞으로 영원히!”
15년이 흘렀다. 며칠 전 전자신문 1면에 '韓디스플레이, 세계 1위 中에 내줬다'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시간을 거슬러 15년 전 롱비치에서 활짝 웃던 얼굴들이 오버랩됐다. 그리고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라고 세 번 외치고 술잔을 기울이던 장면도. 꿈을 꾼 것일까. 영화를 봤던 것일까. 결코 끝날 것 같지 않던 그 '영원의 외침'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한국이 디스플레이 시장을 제패한 15년 동안 천하무적 일본 전자산업은 맥없이 무너졌다. TV가 시작이었다. 'LCD 명가' 샤프는 대만에 팔렸고, 도시바 TV사업부는 중국에 넘어갔다. 최선단에 있던 TV가 무너지자 가전제품의 '재팬 프리미엄'도 거품처럼 꺼졌다. OLED 첨단 디스플레이 적용이 늦은 스마트폰 역시 기를 펴지 못했다.
이젠 우리 차례인가. '세계 경제패권이 동쪽으로 이동한다'는 짐 로저스의 예언이 현실화될까 불길하다. 디스플레이 최강국 중국이 TV, 가전, 휴대폰을 차례로 석권하면 디스플레이가 핵심인 가상현실(VR)·메타버스까지 넘볼 것이다. 그러면 디스플레이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한 중국 정부의 '빅 피처'가 완성된다.
한국 디스플레이 업계엔 패배주의가 만연하다.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에 묻혀 언제부턴가 '서자' 취급을 받아 온 탓이다. 그런데 침몰하던 타이태닉호에 한 줄기 섬광이 비쳤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미래먹거리 국가전략'에 “디스플레이도 차기 정부의 핵심육성산업에 추가한다”고 발표했다. 만시지탄은 아닌지, 걱정도 된다. 하지만 확실한 반전 카드다.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은 소재·부품·장비 국산화 기초체력도 좋다. 지금 필요한 건 자신감 회복이다. 15년 전, 거침없던 '디스플레이 코리아'를 떠올린다. 영원한 디스플레이 최강국, 다시 뛰자.
장지영 부국장 jyaj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