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전인 1992년. 미국 SF 작가 닐 스티븐슨의 소설 '스노 크래시'(Snow Crash)에 처음 등장했던 단어 '메타버스'가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메타(Meta)와 유니버스(Universe) 합성어인 메타버스는 다가올 미래를 대변하는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다. 페이스북조차 사명을 '메타'(Meta)로 바꾸며 메타버스 시대를 기정 사실화했다. 인기를 반영하듯 '핫'한 단어는 어디든 붙이기만 하면 마치 첨단산업인 것처럼 변신시켜 주는 가공할 위력의 '요술 방망이'가 됐다.
하지만 가상현실과 별 차이가 없다는 지적부터 투자와 관심을 끌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까지 시장성에 대한 의심은 여전히 남아 있다. 폭발적 관심만큼이나 의심의 눈길도 따가워지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메타버스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깊어졌다. 혁신이라는 기대감을 먹고 뜨겁게 부풀어 오르지만 아직 기술적으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의구심을 한 꺼풀 벗길 수 있는 분야가 바로 '디지털 트윈'이다. 디지털 트윈은 거대한 메타버스 개념 가운데 현실 측면을 부각하는 분야다. 현실의 물리적 세계와 가상의 디지털 세계를 데이터 중심으로 연결한다. 데이터로 연결된 현실과 가상은 마치 쌍둥이(Twin)처럼 함께 작동하며 상호작용한다.
기업에서는 디지털 트윈을 통해 현실 문제를 가상공간에 투영할 수 있다. 가상공간에서 현실의 문제점을 실험하고, 가상공간에서 도출한 실험 결과는 다시 현실의 사물에 적용해서 문제를 개선한다. 현실과 가상이 실시간으로 동기화돼 순환하는 과정이 기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트윈이다. 디지털 트윈 역시 과거 CPS(Cyber Physical System)로 불리던 기술과 의미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빅데이터,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증강현실(AR), 가상현실(VR) 등 기술 발전과 결합해 과거와 다른 혁신적인 성장을 보일 것이라는 기대감이 응축되고 있다. 무엇보다 가상 환경 실험 결과가 현실세계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에서 '현실적 활용'에 대한 매력도가 높다.
기업이 구현하고 활용하는 디지털 트윈의 핵심 영역은 시뮬레이션이다. 중요한 것은 물리적이고 시각적인 실험뿐만 아니라 데이터 분석을 통해 현상을 해석하고 대안을 도출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즉 가상 환경을 활용해 의사결정을 지원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론이 모두 디지털 트윈에서의 시뮬레이션이다. 예를 들어 공장에서는 각종 설비 데이터가 가상공간에 표현되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장비를 운전해 보며 문제점을 예측할 수 있다. 가상공간에서 예측된 문제점을 보완해 다시 현실 제조 공정에 적용함으로써 정밀한 생산 계획 수립과 효율성 극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런 활용성 때문에 제조공장을 보유한 기업에서 가장 큰 관심과 기대를 보이는 것이다.
디지털 트윈의 진정한 가치는 제조 공정 최적화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기업의 여러 업무 영역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생산과 품질은 물론 세일즈와 마케팅 전략, 교육과 기술 훈련, 경영계획 등 기업 전반에 걸쳐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결국 디지털 트윈은 기업 전체를 가상공간으로 옮겨 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상공간에서는 업무 영역마다 찾기 어렵던 기존 문제를 발견해 내고, 새 문제점도 파악할 수 있다. 도출한 문제는 역시 가상공간에서 해결 방법을 찾아내 다시 기업 현장에 적용한다. 기업은 가상과 현실의 동기화를 반복하며 성장의 동력을 얻는 것이다.
기업 전체를 디지털 트윈으로 구현하는 것은 최고 협업을 가능하게 한다. 모든 업무 활동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연결되고, 시뮬레이션을 통한 분석 결과가 공유된다. 기업 구성원은 AR·VR를 통해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 디지털 트윈은 모든 기업 업무 환경과 일하는 방식을 변화시킴으로써 진정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오래 전에 발표한 가요가 재조명받으며 다시 인기를 얻는 것을 이른바 '역주행'이라고 한다. 30여년 전에 소개된 메타버스는 지난해를 기점으로 그야말로 역주행 조명을 받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2022년 메타버스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메타버스는 이제 막 의심의 고개를 넘으려 하고 있다. 모든 기술 혁신의 시작은 항상 의심에서 시작됐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것이 혁신이었다고 평가받는다. 메타버스 역시 기술 진화와 궤를 함께하며 그 의심을 확신으로 증명해야 하는 시기를 맞았다. 시장은 메타버스 활용성에 기대를 걸고 있다. 디지털 트윈은 메타버스 활용성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근접한 영역이다. 아직 제조기업 등 특정 영역에서 관심받고 있지만 디지털 트윈은 기업 운영 전반에 걸쳐 큰 파급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메타버스와 더불어 디지털 트윈의 획기적인 성장이 기대되는 이유다.
이진용 코오롱베니트 대표이사 leej@kolon.com
◇필자 소개=이진용 코오롱베니트 대표이사는 30여년간 코오롱그룹에서 근무하고 있다. 1989년 ㈜코오롱에 입사해 2000년 코오롱인베스트먼트 대표이사를 지냈다. 이후 2007년 코오롱그룹 회장 비서실장, 2011년 ㈜코오롱 윤리경영실장, 2013년 ㈜코오롱 경영혁신실장을 역임했다. 2015년에는 코오롱그룹 핵심 계열사인 코오롱인더스트리에서 경영지원본부장직을 맡았고, 2017년에 코오롱베니트 대표이사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