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술은 들어도 몰라요. 대표 눈빛이 번뜩이는지, 말에 자신이 넘치는지 봅니다. 느낌이다 싶을 때 돈을 넣습니다.” 벤처기업을 발굴, 투자하는 지인의 말이다.
신생기업 성공률은 15% 안팎이다. OECD 국가 중 높은 편이지만 망하는 기업도 많아 변동성이 크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부동산업 급증과 도·소매업 급감이다. 다행히 과학기술·정보통신 발전지표에 속하는 벤처기업(벤처공시시스템에 등록된 기업)은 1998년 약 2000개, 2007년 약 1만4000개, 2020년에는 약 3만9000개로 20년간 비약적으로 늘었다. 이 가운데 인공지능(AI) 기업은 몇 개나 될까. AI를 얘기하지 않는 기업이 없고, 많은 젊은이가 AI 창업에 나서고 있다.
과거 개발도상국 시절에는 국민의 혁신 역량이 약했다. 그 탓에 정부가 기업처럼 직접 산업에 뛰어들어 “나를 따르라!” 하며 앞서고, 국민이 자유를 희생하며 노력해서 선진국을 따라잡았다. 그러나 그 방식은 국민의 혁신 욕망과 역량이 어느 때보다 높은 2021년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에 AI 파워 기업이 넘쳐 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정부가 무엇을 할지 고민하기 이전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명나라 만력제 15년에 만리장성 넘어 어린 오랑캐 하나가 소란을 피운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진압 여부를 둘러싸고 지휘관 사이에서 서로 탄핵하는 일이 벌어졌다. 명나라 조정은 두 지휘관을 모두 문책하지 않는 선에서 타협했고, 정작 오랑캐에 대해서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오랑캐 누르하치는 힘을 축적했고, 손자에 이르러 중국 전체를 다스리게 된다. 그렇다. 잠재력 있는 기업은 건드리지 말고 내버려 두면 크게 성장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작은 분란에 놀랄 필요가 없다. 기업이 실패해도 괜찮다. 빠른 실패는 돈으로 살 수 없는 현장 교육이다. 시장에 들어와서 빠르게 실패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문제다. 한국판 뉴딜 명목으로 젊은 기업에 무작정 돈을 푸는 것도 안 된다. 정부 의존도만 높이는 부작용이 있다. '착한 규제'라는 명목으로 기업의 창의를 옥죄는 일도 안 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정부가 반드시 해야 할 일도 있다. 우선 AI 사업이 기득권과 부딪치는 경우다. 시장에서의 시간은 돈이다. 이런 갈등은 빠르게 정리해 줘야 한다. 개인정보 보호와 데이터 활용의 충돌은 가명 처리를 해서 산업 연구를 할 수 있다고 결론이 났지만 오랜 시간을 낭비했다. 모빌리티업계와 택시의 오랜 갈등도 마찬가지였다. 효과적인 갈등 예방과 분쟁 해결을 위해 공적 논의에 참여토록 의무를 부여하는 등 필요한 절차와 이슈를 입법해야 한다.
둘째 기존 규제 중에서 무엇을 제거할지 고민해서 실행해야 한다. 폐해가 크고 소관 부처를 달리하는 여러 법령에 나뉘어 있는 규제라면 반드시 없애야 한다. 다만 국민의 생명·신체·안전에 관한 규제는 해야 한다. 잘되자고 하는 일이 우리의 마음과 몸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셋째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시장지배력을 확보하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장지배력을 남용하는 것은 나쁘다. AI시대 자본과 기술을 독점하는 대기업이 시장을 좌우할 수 있다. 대기업이 거래를 미끼로 AI 기업의 공급 단가를 후려치거나 부당한 거래 조건을 더하는 행위는 없어야 한다.
넷째 AI 생태계 필수 인프라를 미리 조성해야 한다. AI시대에는 클라우드센터, 자율주행 도로, 안정적인 전력 공급, 끊김 없는 통신 등 사회간접시설이 중요하다. AI시대가 상당히 진행된 이후에 인프라를 갖추려면 비용이 많이 든다. 빨리 시작할수록 좋다.
이 같은 조건이 갖춰지면 누가 투자하지 않겠는가. AI시대는 패스트 팔로어를 허락하지 않는다. 오직 퍼스트 무버만이 살아남는다. 혁신 아이디어가 있는 국민과 기업이 앞장서고, 정부가 든든한 울타리가 돼야 한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AI-지식재산 특별전문위원회 위원장) sangjik.le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