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Retro)’에서 ‘뉴트로(Newtro)’로의 중심에 선 우리들의 자화상
◇ 온라인 SNS용 전시? No! 여자라면 꼭 봐야 하는 전시!
인스타그램 등의 온라인 SNS가 주요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 과시형 문화 소비가 잦아진 요즘. 값비싼 작품들을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관람해야 하는 전시문화는 찾아보기 힘들어진지 오래다.
인생 사진을 건질 수 있다는 팬시한 작품들과 포토월이 즐비한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도 가볍게 관람이 가능한 전시들이 주를 이루고 전시가 가지는 전통적인 의미를 찾기보다는 사진이 잘 나올 수 있는 조명의 위치가 관람객들에게는 더 중요해진 이 때. 익숙하지 않은 전시 주관사의 이름을 단 ‘강남모던걸’ 전시는 또 하나의 ‘인증샷’용 전시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했다.
하지만 ‘강남모던걸’ 전시를 직접 눈으로 보고 난 이후 해당 전시에 대해 선입견을 가졌던 것이 무척이나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강남모던걸’ 전시는 최근 관람했던 전시 중 가장 디테일이 뛰어났으며 공간의 활용이 훌륭했고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 돋보였다.
영화 ‘암살’의 전지현이 맡았던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열사와 시인 이상과 화가 김환기의 뮤즈였던 ‘김향안’,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성악가이자 배우인 ‘윤심덕’과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 세계적인 무용가였던 ‘최승희’ 등 ‘신여성’의 삶을 살다간 그녀들을 모티브로 꾸며놓은 섹션들은 마치 그 시대로 돌아가 서로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강남모던걸’ 전시의 시작에 등장하는 ‘신경자’라는 ‘신여성’이 창작되었다는 것도 놀라웠고 75일 만에 이 정도 규모의 전시를 준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일제강점기라는 불행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그 시절의 ‘신여성’들과 2020년을 살고 있는 ‘현대 여성’들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전시가 가지는 주체이자 철학이었다.
운 좋게도 ‘강남모던걸’ 전시의 원안자이자 총감독이면서 주관사인 ‘지미컴퍼니’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이미연’ 대표를 만나 전시와 관련된 궁금증들을 해소할 수 있었다.
◇ ‘강남모던걸’ 전시의 원안자이자 총감독인 ‘이미연’ 대표와의 1문 1답
문 : 전시를 기획하게 된 배경과 원안자로서의 기획의도는 무엇이었나?
답 : 기존에 다양하게 했던 콘텐츠 사업들이 업계에 불황으로 새로운 문화콘텐츠 사업 아이템을 찾던 중 비주얼 체험 전시가 하나의 트렌드를 넘어 장르로 토착화하는 타이밍에 맞춰 전시 콘셉트 30여 개 이상을 만들면서 같이할 파트너를 찾아다녔다. ‘강남모던걸’은 그때 만들었던 기획안 중 하나였다. 삼청동에서 우연히 복고풍의 복장을 입은 젊은 여성들을 보았고 거기에서 힌트를 얻었다. 전시를 위해 자료 조사를 하다 보니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의 ‘힙스터(hipster)’는 ‘모던걸’이었고 그녀들의 편견과 차별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 : 그렇다면 ‘강남모던걸’은 ‘지미컴퍼니’의 첫 전시인데 75일 만에 전시를 오픈했다고 들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떠한 것이었나?
답 : 개인적으로 ‘강남모던걸’을 가장 먼저 전시화 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변인들의 호응도가 가장 높았고 ‘레트로’와 관련된 지금의 시류가 언제 변화할지 알 수 없었기에 빠르게 전략을 수립했다. 목표가 주어졌고 그 일정에 따라 앞만 보고 달렸다. 과정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기는 하지만 준비를 마치고 나니 다들 뿌듯해했다. 그러나 다음에는 이렇게 급박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 : 짧은 기간 동안 전시를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답 : 많은 인원들이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한 방향만을 보며 달려야 했기에 왜 그 일들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이해를 시킬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숨 고를 틈 없이 해야만 하는 일들을 쳐내가며 일을 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기에 닥치는 대로 다른 전시들을 보러 다녔고 벤치마킹을 했다.
문 : 직원 한 명 없이 비서 한 명과 단둘이 전시 준비를 진행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답 : 제가 전시 원안자여서 전시의 진정한 의미와 키워드를 전시 관계자들 전원에게 공유하는 과정이 시간이 없는 관계로 꽤 힘들었다. 그리고 완성도 높은 전시를 위해 직접 챙겨야 할 디테일이 너무 많았다. ‘강남모던걸’을 준비를 함께한 ‘이지형’ 팀장과는 인연이 아주 깊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실제로는 개인 비서와 같은 업무들을 소화해 준다. 말도 없이 맡은 일은 꼭 해내기에 믿는 것 같다. ‘이지형’ 팀장이 없었으면 전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 : 이번 전시에 신진작가들을 많이 기용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가는?
답 : 수수 작가, 다혜 작가, 온진 작가, 라미 작가, 몽상 작가, 아갸미 작가, 정혜영 작가, 최지인 작가, 줄리 작가, 아도라 작가, 고봄 작가, 김범진 작가 등등 이번 전시와 함께 했던 모든 작가들이 상당히 많다. 작가들 전체가 신인이라 반대가 만만치 않았지만 저는 그들의 재능을 믿었고 그들도 이번 전시를 통해 놀라운 성장을 보여줬다. 작가들 모두가 고맙지만 굳이 한 명의 작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메인 작가인 수수 작가를 꼽고 싶다. 애초에 메인 작가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하차하면서 11월 초에 패션 전공자인 수수 작가의 그림의 독특한 선을 믿고 메인으로 끌어올렸다.
문 : 설치미술팀으로 ‘EE토털아트’와 ‘308아트크루’를 선택한 이유는?
답 : 일정이 너무 촉박했기 때문에 설치미술팀은 하나의 섹션을 온전히 맡아서 흡족한 결과물을 내어줄 수 있는 그 분야의 일인자들이 필요했다. 유명 밴드의 보컬로 활동했던 이윤정 씨가 남편인 이현준 씨와 함께 ‘EE토털아트’라는 설치 미술 그룹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업계에선 최고의 프로팀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들에게는 모던걸 ‘나혜석’의 방을 맡아달라 부탁했고 ‘308아트크루’에게는 모던걸 ‘김향안’의 방을 맡아달라 부탁했다. 너무나 짧은 일정이었기에 콘셉트를 설명하고 컨펌만을 진행했다. 전적으로 그들을 믿고 맡겼고 결과물에선 미안하고 아쉬움이 제일 많은 팀들이다. 그들의 역량을 못 받쳐준 부분에 대해 감독으로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문 : 인터뷰 내내 ‘어벤저스 공간 팀’이라고 호칭한 분들이 궁금하다.
답 : 이번 전시 시작부터 ‘강남모던걸’의 전시 키워드를 가장 완벽히 이해한 염지혜 공간 디렉터와 이재용 공간 연출, 한진연 공간 디자이너, 장아람 팀장 이분들이 없었으면 12월 20일 오픈은 불가능했다. 제가 살면서 만난 가장 프로인 분들이었다. 그들의 놀라운 집중력과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문 : 전시 오픈을 한 후에 가장 아쉬운 점은?
답 : 여러 가지 악재(짧은 기간과 넉넉하지 못한 예산 등) 속에서 전시 오픈 준비를 했기에 홍보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재미있고 즐거운 화젯거리를 만들고자 했는데 여러 사정들로 인하여 실현되지 못했고 이제라도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나갈 생각이다. 비단 여성들뿐만 아니라 오해나 편견으로 차별당하는 모든 이들이 살아가는 현시대의 어려움에 대해 다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문 : 전시의 시작 부분에서 등장하는 모던걸 ‘신경자’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만들게 된 계기와 비하인드
답 : 비슷한 비주얼(visual) 콘셉트의 전시들이 원작의 저작권을 구입하여 전시를 만들고는 하는데 ‘강남모던걸’의 주인공 격인 ‘신경자’라는 인물은 시대적 배경 속 여성을 가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국내 비주얼 체험 전시 최초의 순수 창작물로 1915년도에 태어나서 1937년에 스물두 살의 나이로 일제강점기의 불행한 시대를 살았던 ‘신여성’을 창조해냈다. 가상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온전한 이야기가 담길 수 있도록 그녀의 가족관계와 장래희망, 직업과 실제의 삶과 같은 것들을 매우 세밀하게 설정해 두었다.
문 : ‘강남모던걸’ 전시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주제는?
답 :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편견과 차별로 인해 억압되었던 100여 년 전의 ‘모던걸’들이 이후 긴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강조하고 싶었다. 그 시대를 살아간 ‘신여성’들은 인생의 말로가 좋지 못했다. 지금도 당시와는 많은 것들이 변화하였지만 시대를 앞서나가는 여성들을 배척하는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불공정한 대우 역시도 문제이다. ‘원자핵을 쪼개는 것보다 깨뜨리기 힘든 것은 사람들이 가지는 편견’이라고 아인슈타인이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풍토가 만연해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번의 전시로 인해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작은 발걸음 하나를 내딛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느끼고 있다.
◇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마주해 볼 필요가 있는 ‘강남모던걸’ 전시
꽤나 긴 시간을 할애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준 ‘이미연’ 대표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통하는 부분이 너무나 많았고 살아온 과정과 삶에 대한 마음가짐도 비슷한 점이 많은 ‘모던걸’의 표상이 아니었나 한다.
누군가는 ‘강남모던걸’의 전시를 보고 ‘이미연’ 대표에게 페미니스트냐고 묻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여자들의 이야기를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의 프레임을 끼우고 보는 사회적 시각 자체가 편견이고 차별이라 생각한다.
‘신여성’인 ‘모던걸’들에 집중하는 전시이지만 그들은 그 시대의 ‘모던보이’들을 열렬히 사랑했고 그들과 함께 생사를 같이 했다. ‘윤심덕’의 곁에는 ‘김우진’이 있었고 ‘김향안’의 곁에는 ‘김환기’가 있었다.
전시는 누구보다도 먼저 신문물을 접하고 시대를 앞서기 위해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혔던 ‘모던걸’들이 고작 ‘할로 껄(전화교환원)’이나 ‘숍 껄(백화점의 판매원)’, ‘에레베타 껄(엘리베이터 층수를 눌러주는 안내원)’ 등의 직업 밖에는 가질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전달한다.
물론 그 시대에는 이루지 못했던 꿈과 소망들을 헤아려 그녀들이 바랐을 법한 모양새로 이쁘게 꾸며 놓았지만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면 ‘페미니스트’ 취급을 받는다던 ‘82년생 김지영’의 소설과 영화를 보면서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겪는 평균치의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가 어찌하여 ‘페미니즘’ 문화로 곡해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여전히 잘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필자이기에 ‘강남모던걸’ 전시는 100년 전 여성들의 모습과 겹쳐 보일 수밖에 없는 현세의 그녀들을 재조명해 보는 하나의 장인 양 여겨졌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편견이란 깨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과거를 되돌아 보고 현재를 반성하여 미래를 향한 꿈을 꾸다 보면 “그땐 그랬었지…”하며 웃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인생 사진을 찍기에 좋은 전시가 아니라 우리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우리 엄마’의 손을 잡고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전시로 입소문이 나기를 바란다.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동성의 여자친구들과 혹은 남자친구들과 함께 관람하면서 서로를 이해해보는 것도 추천한다.
전자신문 컬처B팀 오세정 기자 (tweet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