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온뉴스 이예은 기자] ‘도깨비 신드롬’을 만들어낸 tvN 드라마 '도깨비'에서는 남녀 주인공 도깨비인 김신(공유 분)과 지은탁(김고은 분)보다, 김신과 저승사자(이동욱 분) 커플을 향한 대중의 반응이 뜨겁다. 이에 제작사는 두 남자의 ‘브로맨스(bromance)’를 내세우며 적극적 홍보에 나서고 있다. 낯선 광경은 아니다. 남성 중심의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만큼 브로맨스는 국내에서도 오래 전부터 흥행 코드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올해,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워맨스’가 본격적으로 등판하며 하나의 콘텐츠 코드로 자리 잡은 것이다. 워맨스는 워먼(woman)과 로맨스(romance)를 합친 용어다. 여성 간 느끼는 성적 감정이 아닌, 우정 혹은 애틋한 감정 등을 동반한 친밀한 관계를 뜻하며 동성애와는 다른 개념이다. 물론 지금의 워맨스 양상이 이전에도 비슷하게 존재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여자 주인공 간의 갈등 혹은 화해 정도로만 그려졌을 뿐, 브로맨스처럼 콘텐츠화 되지는 않았다.
이제껏 여성 캐릭터 간 관계는 주로, 경쟁 및 질투 구조로 그려지거나 남성 캐릭터를 보조하며 그를 두고 다투는 쟁탈전에 그쳤다. 이는 자연스레 여성 캐릭터 본연의 매력을 가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워맨스는 여성 캐릭터를 조명시키는 데에 탁월하다. 동시에, 여성 간에 느낄 수 있는 동질감 및 공감 코드를 이끌어내며 한층 더 극에 몰입하게 만든다.
2014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마마'부터 본격적으로 워맨스가 국내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승희(송윤아 분)와 서지은(문정희 분)은 문태주(정준호 분)를 사이에 두고 적대적 관계였으나 이해와 공감을 통해 서로의 '편'으로 거듭나면서 애틋함을 선보였다. 기존 드라마의 남녀주인공이 주고 받을만한 대사를 두 여배우가 나누며 많은 여성 팬들을 모았다. 남녀주인공이 했으면 뻔할 수 있는 클리셰를 여성이 주고받으니 독특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송윤아는 각종 인터뷰 및 방송에서, 문정희와 ‘베스트 커플상’을 받고 싶다고 여러 차례 언급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쏟아져 나오는 브로맨스에 비해 여전히 낮은 관심 속에 머물러있던 워맨스가, 올해부터 극장가와 방송가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올해 2월에 방영됐던 ‘돌아와요 아저씨’가 방송가 워맨스 바람에 첫 스타트를 끊었다. 김수로의 영혼이 들어간 오연서가 이하늬와 로맨스를 펼치면서 ‘여여케미’를 발산했다. 시청자들은 김수로 본연의 모습이 등장할 땐, 오히려 아쉬워했다.
뿐만 아니라, 다섯 여대생의 동거를 담으며 우정을 그려낸 ‘청춘시대’, 양성애자 역의 나나와 전도연이 선보인 미묘한 상생 워맨스 ‘굿 와이프’, 이미숙과 박지영이 ‘질투의 화신’에서 유쾌하게 뽐낸 연대의식까지 다양한 형태로 워맨스를 펼쳤다.
예전과 비교해 여성 중심의 영화가 꽤 등장했던 올해 극장가에서도 워맨스는 그려졌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이야기를 그린 ‘덕혜옹주’ 속 손예진과 라미란이 나눈 애틋한 의지와 정은 대중들의 마음을 울렸다.
색다른 건, 워맨스가 긍정적인 관계에서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최근 방영중인 드라마 ‘불야성’은 이요원과 유이의 워맨스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가운데, 두 여성 캐릭터는 친밀감도, 상생 관계도 아닌 대립 관계다. 냉철한 CEO 이요원이 가난한 유이의 욕망을 끄집어내며 자신의 페르소나로 만들어가는 이야기로, 극의 긴장감을 계속해서 유발시키지만 남녀주인공을 방불케 하는 대사와 미묘한 애증 관계가 나타난다.
더불어 공효진과 엄지원이 투톱으로 나선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도 마찬가지다. 두 여성은 극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로 등장하지만 그들에게는 ‘모성애’와 ‘여성’이라는 요소를 공유하며 교감을 만들어낸다.
다양한 양상의 워맨스에 대중들이 호응하고 있는 가운데, 콘텐츠를 생산하는 이들도 이에 힘을 실었다. 대중이 알아채기 전부터 많은 제작사는 홍보 과정에서 워맨스를 키워드로 잡아 적극적으로 내세웠다. ‘불야성’은 제작발표회부터 직접 워맨스에 주목해달라고 언급했다. 그 영향인 지, 이요원과 유이와 함께 진구도 주요 캐릭터지만 초점은 주로 이요원과 유이의 관계로 흐르고 있다.
‘미씽’의 엄지원과 공효진도 계속해서 워맨스를 강조했다. 엄지원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브로맨스는 이제 지겹지 않나. 이젠 새로워질 때도 됐다. ‘여여케미’도 재미있다”고 언급했다. 콘텐츠를 생산하는 업계도 워맨스를 흥행 코드로 인식하는 걸 증명한 셈이다.
이는 최근, 사회에서 강하게 불고 있는 페미니즘 바람의 영향도 있다. 남성 중심의 콘텐츠를 넘어서 여성 콘텐츠도 골고루 나오길 바라는 많은 여성들의 갈증이 워맨스를 통해 표출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2015년에 개봉했던 영화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의 박보영과 박소담, ‘차이나타운’의 김혜수와 김고은의 워맨스는 당시 눈길을 끄는 것에 실패했지만, 두 작품이 올해 개봉했더라면 흥행 판도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하재근 평론가는 “올해 트렌드 하나가 ‘걸크러쉬’라고 해서 여성들의 등장이 주목을 받았다. 예능에서도 ‘슬램덩크: 언니쓰’ 같은 것들이 인기를 얻었다. 그런 트렌드가 다른 분야에서도 전체적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계 역시 워낙 남자들 위주로 돌아가다 보니까 그에 대한 반발로 여성들을 종용하는 것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우정 같은 것들도 보면 남자들이 독점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제는 여성들도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인식이 생기고 있다”며 “올해, 사회적으로 여성 혐오에 대한 반발이 크게 일어났기 때문에 대중문화계나 전반적인 흐름 속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주목받는 현상이 ‘워맨스’ 호응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고 의견을 전했다.
물론 흥행코드로 자리 잡을지에 대한 판단은 아직 섣부르다. 이미 2017년 초, 개봉을 앞두고 있는 ‘공조’ ‘마스터’ ‘더킹’ 등 브로맨스 작품은 줄줄이 공개되고 있지만 워맨스 영화는 ‘여교사’가 전부다. 그마저도 남학생을 사이에 둔 두 여자의 심리 이야기이기에 워맨스라고도 확정 짓기 어렵다. 내년에도 올해와 같은 흐름을 이어나갈지 지켜봐야 한다. 브로맨스와 함께 하나의 콘텐츠가 되어가는 워맨스의 활성화는 더욱 다양한 여성 중심의 콘텐츠를 창출할 수 있는 경쾌한 신호다. 또한 여성 콘텐츠가 낯설고, 독특한 시도가 아닌 보편적인 형태가 될 수 있는 긍정적인 기회다.
전자신문 엔터온뉴스 이예은 기자 9009055@entero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