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온뉴스 이예은 기자] 재난영화란 재난이 발생하고, 사람들은 위기를 맞이하고, 선인과 악인으로 나뉘어 다투며 고군분투하면서 결국 비극이든 희극이든 하나의 결말로 도달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판도라’도 이러한 서사를 갖춘 특별할 것 없는 재난 영화였다. 하지만 개봉까지 4년간의 시간이 걸렸던 ‘판도라’에게 ‘2016년 개봉’은 특별한 저력을 지니게 했다.
5년 전,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상당한 피해와 여러 나라의 탈핵 등을 유발시켰으나 한국에서는 아무런 정책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지난 9월 12일, 경주에서 일어난 강한 진도의 지진과 수차례 여진으로 상황은 달라졌다. 지진이라는 재난 상황에 익숙지 않던 국민들에게 큰 불안감을 안겨주며 ‘원전’이 화두에 오르게 된 것이다. 실제 세계최대규모의 원전밀집지역은 우리나라의 동해안이다.
박정우 감독은 ‘원전 사고’라는 큰 스토리라인 안에서 다양한 인간의 군상을 다루며 과감하게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하고 있는 소시민 재혁(김남길 분)은 지진 발생으로 인해 원전 폭발 사고가 일어나면서 엄마(김영애 분), 형수인 정혜(문정희 분) 그리고 여자친구인 연주(김주현 분)를 지키기 위해 영웅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길섭(김대명 분)을 비롯하여 그의 친구들은 이 영화에서 강자대신 ‘선’이 된다. 이 과정에서 배우들은 삶의 끝자락에 서있는 인간의 갈등 모습을 처절하게 표현해낸다.
예상했다시피 ‘윗분’들은 철저히 이익 중심적으로 그려진다. 위기에 빠진 국민보다는 경제를 챙기고 진상 규명보다는 은폐를 시도한다. 수없이 재난영화를 접해온 관객들은 이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관객들에게 ‘판도라’ 속 정치인의 모습이 진부함이 아닌 허탈하게 다가오는 건, 무능한 정부의 모습이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고 발생 전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 위험을 숨기기 급급한 원전의 고위 관계자들, 진실을 밝히려다가 좌천되는 인물, 무능한 대통령 그리고 실세로 자리 잡은 국무총리까지, 이 풍경은 더 이상 놀랄 이유도 없이 낯익다.
물론, 주축으로 세운 등장인물들이 많다 보니, 각 캐릭터의 뚜렷함이 나타나지 않아 아쉬움을 자아내기도 했고 배우들의 사투리 연기는 보는 사람들까지 어색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재난 영화의 고질병으로 불리는 개연성의 허점과 ‘억지 감동’ 식의 신파 전개까지 빠지지 않았다. 인물 설정은 ‘해운대’를 연상시키고, 전개는 ‘괴물’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CG는 걱정과 달리 이질감 없이 훌륭한 시각 효과를 제공했다. 오랜 기간 연구를 증명하 듯, 원전 발전소 내부 구조는 디테일함이 살아있었고 원전 사고 설정의 당위성도 부여했다. 아쉬운 연출은 조영욱 음악 감독의 음악이 담백하게 이야기를 잡아주고 응축시키는 데에 탁월하게 작용했다.
‘판도라’는 국민이 꿈꾸는 이상까지 함께 그려냈다. 주변 인사들 말에 휘둘리던 대통령이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 분명히 이 영화가 제작 되던 기간에 우리가 연상할만한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름끼칠 정도로 유사한 사건들이 속속 발생하고 있고, 박정우 감독은 운(?)좋게 관객들에게 단순히 영화적 재미뿐만 아니라 사회에게 화두를 던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원전에 대한 위험성은 수차례 제기되어왔지만 아무런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배우와 감독은 ‘판도라’는 사회 고발 영화가 아니라고 계속해서 언급하지만 관객과 사회가 어떻게 호응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성격은 재정의(再定義) 될 수 있다. 평범한 재난 영화가 이끌어낸 파장은 특별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7일 개봉 예정.
전자신문 엔터온뉴스 이예은 기자 9009055@entero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