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온뉴스 이주희 기자] 성매매로 입에 풀칠하고 사는 할머니, 그리고 다른 노인들의 자살을 돕는 ‘죽여주는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죽여주는 여자’. 윤여정은 이재용 감독과 벌써 세 번째 호흡을 맞췄고, 시나리오를 보기 전부터 출연이 결정된 상태였지만, 처음 시나리오를 보고 “이걸 나보고 하라고?”라며 놀랐다고 한다. 심지어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감독 또한 이 작품을 포기할 뻔 했다고 한다. 상업영화로 투자하기 힘든 작품인데다 자신이 건드릴 만한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주연배우로 점찍어뒀던 윤여정이 힘이 됐다. 대본을 본 이후에 출연을 번복해도 됐지만, 윤여정은 약속한 대로 이재용 감독과 함께 하기로 했다. 어떤 사람도 쉽게 다루기 힘든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이재용 감독이 이 내용을 자극적으로 찍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여정의 예상대로 감독은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무거운 주제를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맨 처음에 시나리오를 보고 감독님이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면, 사람들을 죽여줄 수 있겠는지 물어 봤다. 나는 죽여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맡은 소영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정말 죽고 싶었지만 꾸역꾸역 살고 있는데 사람들은 손가락질까지 한다. 게다가 처음으로 죽이는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인데, 처음으로 죽이는 노인은 모욕적으로 살고 있다. 정신은 멀쩡한데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자살도 혼자 힘으로 못하는 것이다. 얼마나 끔찍할까. 나(소영)를 죽이는 심정으로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성매매 이야기의 구체적적인 상황 설명이 필요했고, ‘죽음’에 관한 내용이라 아무리 한 걸음 떨어져 보더라도 처참한 현실은 느껴질 수밖에 없다.
“젊은 사람이 더 처참하게 느낄 수 있다. 나는 젊은 사람들에 비해 물리적으로 죽음에 더 가까운 사람이라 오히려 담담할 수 있다. 뉴스에서도 성매매 할머니들을 봤지만 이렇게 세세하게 알지는 못했다. 피상적으로 알았지만 내가 직접 표현해야 하니까 고통스러웠다. 예전에 성매매를 하던 84세 할머니가 잡혔다는 뉴스를 봤는데 정말 슬펐다. 우리 다 같이 대책을 좀 세워보자.(일동 웃음) 나도 생각을 해봤다. 유럽에서는 이런 상황에 대해 많이 질문한다. 왜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지 않냐고. 우리나라에서는 국민연금으로 40만원을 받는데, 80~90세까지 일을 안 하고 산다면 돈을 얼마나 벌어놔야 할까. 내가 보건복지부 장관도 아니라 대책을 세울 수도 없고, 만약 장관이라고 하더라도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함으로써 지금 젊은이들이 늙었을 때는 그런 할머니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는 성매매를 하며 살아가는 소영 외에도 소외된 우리 이웃의 모습을 담고 있다. 소영의 곁에는 트랜스젠더(안아주 분), 코피노(필리핀과 한국 혼혈인) 소년, 다리 하나 없는 청년(윤계상 분)이 있는데, 그들은 상대방을 걱정해주는 대신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서로를 위로한다.
“아픔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꼬치꼬치 캐묻는다. 이혼을 한 사람은 이혼한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묻지 않는다. 우리 영화에서 소영이 코피노 아이를 데려오는데, 이웃 사람들은 단순히 ‘뭐야?’라고 물어보고, 소영은 ‘그냥 주워왔어’라고 말할 뿐이다. 아이를 맡길 때도 그냥 맡아준다. 이게 연속극이라면 그 아이를 왜 데려왔는지 2회는 할 수 있다.(웃음)”
윤여정이 약자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이유는 본인도 약자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그동안 고생한 세월 덕분에 여유롭게 살고 있지만, 젊은 시절 그는 외로웠었다.
“약자였던 적이 있었다. 지금 한국인들은 신나게 여권가지고 다니겠지만(웃음) 예전에 내가 미국, 호주에 살았을 때는 그곳 사람들이 동양인을 쫓아다니면서 놀렸다. 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먹는 밥을 신기해하기도 했다. 다들 힐끗힐끗 쳐다봤다. 그게 소수자지 뭐겠나. 이재용 감독이 소수자를 그리는 방식이 참 좋았다. 소수자는 어디든지 있다. 그런데 게이라는 이유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이 있다. 성정체성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것뿐이지 똑같은 사람이고 범죄도 아니다. 그런데 범죄자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어 안타깝다.”
윤여정은 처음에는 절실해서 일을 했고, 이후에는 그 시기를 보상하고 싶은 심리로 일을 했다고 한다. 옷을 근사하게 입겠다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좋아하는 감독과 작품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살아온 윤여정은 이제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죽음에 대해서는 하버드 교수 책도 읽었는데 그 분도 별수 없더라.(웃음) 나는 자기 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남이 산 발자취 쫓아가서 뭐하겠나. 답은 없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OECD 국가에 들어가려고 애쓴 것 같다. 이제 백세 시대가 됐으니까 ‘어떻게 죽을 것이냐’도 생각해야 한다. 죽음은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다 죽는 것이 가장 잘 죽는 것 같다. 물론 약장수 맘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웃음)”
전자신문 엔터온뉴스 이주희 기자 leejh@entero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