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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온뉴스 이주희 기자] 영화 ‘비트’ ‘태양은 없다’에서는 20대 청춘을,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로맨틱한 모습을 그렸던 배우 정우성이 영화 ‘아수라’에서는 삶에 찌든 중년의 악역으로 나타났다.
정우성이 맡은 한도경은 추악한 주변 상황과 더불어 악인이 되는 인물로, 생존을 위해 점점 악랄해지는 캐릭터다. 그는 형사임에도 불구하고 악덕 시장 박성배(황정민 분)의 뒷일을 처리해주면서 돈을 버는데, 더럽고 치욕적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다”고 슬픈 독백을 전해 연민을 느끼게 한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이런 내레이션은 과거 김성수 감독-정우성이 만들었던 영화에서도 이미 활용됐던 방안이다. 김성수 감독이 계속해서 영화에 정우성의 내레이션을 집어넣는 이유는 무얼까.
“내레이션을 할 때 한도경이 정말 너무 힘든 상태에서 푹 꺼지는 의자에 앉아 자기 고백하듯 회고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레이션을 하는 것은 중간적인 사람으로도 보일 수 있다. 인물의 심정을 직설적으로 말할 수 있고,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화자의 입장이기도 하니까 캐릭터와 관객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캐릭터로서는 유리한 점도 있는 것 같다.”
한도경의 내레이션은 영화 전체적인 분위기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면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힘없이 관조한다. 이런 내레이션에는 김성수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담겨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눈을 뜨고 죽는 마지막 엔딩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편집된 부분이지만 사실 마지막 시퀀스에서 한도경은 누군가를 바라보고 죽는데, 카메라는 그의 눈동자에 비친 누군가를 담으면서 끝이 난다. 그 누군가는 자신인 한도경이었고, 감독은 마지막 편집 과정에서 이 장면을 삭제했다고 한다.
“사실 안남이란 도시는 한도경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감독님께서는 한도경을 중심으로 주변 사람들이 거울이라고 했다. 성모는 한도경의 과거이고, 박성배는 한도경의 미래일 수도 있다. 본인의 얼굴인데, 자기인 줄 인식을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내레이션이 자기에 대한 고백처럼 느껴진다. 다이어리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다.”
이들이 있는 공간인 안남이라는 도시는 악이 자연스럽고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다. 또 다른 악인을 계속 생성하는 구조인 것이다. 한도경 역시 환경이 생성해낸 악인이다. 정우성은 환경에 의해 변화하는 것과 타고난 본성 중 어떤 쪽을 믿을까.
“본성이 환경을 이길 수도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아 확립이 중요하다. 그래서 자기 일을 되돌아보고 성찰을 해야 하는 것 같다. 자아를 포기하면 환경에 먹힐 수밖에 없다. 세상 안에 내가 있지만, 나로 인해 세상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
사실 정우성은 부유하게 자란 사람은 아니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왔다.
“어렸을 때 환경으로 인해 얻은 것을 잃은 것도 있다. 나는 어린 시절 철거촌에서 가장 마지막에 이사 나왔을 만큼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다만 내가 못사는 것에 대한 원망보다는 빨리 내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린 나이에 내게 가해지는 불합리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에 대한 정당성을 찾으려고 했다. 떳떳해지고 싶었고 신세지기도 싫었다. 그래서 지금도 얻어먹는 것보다 사주는 게 더 좋다. 만약 어떤 일을 해서 안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모두 내 책임이다. 내가 가지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일을 했을 텐데, 그게 충족이 안 되면 원망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상처를 받는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극복이 된다.”
모든 일의 책임을 자신에게 묻고 사람 좋게 허허 웃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우성이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무엇일까.
“명분과 자아를 잃기 싫다. 당장 내일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른다. 타협을 할 수도 있고 버티기도 하겠지만, 정당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전자신문 엔터온뉴스 이주희 기자 leejh@entero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