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온뉴스 이주희 기자] 1800년대, 남루한 행색이지만 눈빛은 반짝거리는 한 남자가 길을 걷는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다. 지도를 만들어서 저잣거리 백성들과 공유하는 것.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에는 커다란 자연 속에서 너무나도 작지만 자신의 소신대로 끊임없이 발길을 옮기는 김정호(차승원 분)의 모습이 담긴다. 그의 여정은 험난하지만 아름답다. 백두산 천지부터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합천 황매산, 노을이 깔린 여수 여자만, 꽁꽁 언 북한강 등 걷기만 해도 그림이 되는 우리나라의 절경과 사계절 풍경을 오랫동안 차분하게 스크린에 담았다. CG로 착각할 만큼의 뛰어난 영상미가 인상적이다.
김정호는 조선 당시의 땅을 하나하나 밟으면서 완벽한 지도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대동여지도는 전체 크기 세로 6.7m, 가로 3.8m의 대형지도로 지금 보더라도 그 정교함에 눈을 뗄 수 없다. 특히 목판본으로 만들어져 대량 생산이 가능했고 백성들과 공유했다는 점이 특별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를 만들었지만, 이것을 만든 김정호의 삶은 역사에 몇 줄 쓰여 지지 않았다. 대신 원작 소설가 박범신과 강우석 감독은 당시 시대상과 대동여지도에 담긴 김정호의 정신을 기반으로 캐릭터를 빚어냈다.
3년 만에 집에 돌아온 그는 하나뿐인 딸 순실(남지현 분)의 얼굴도 몰라본다. 남들이 지도에 미친 사람이라는 손가락질을 해도,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그는 무엇보다 지도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김정호가 목숨을 내놓고 지도를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예술가적인 기질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백성의 민주화를 위해서 라고도 한다.
후자는 당시의 권력가들과의 갈등으로 설명된다. 흥선대원군(유준상 분)과 또 다른 권력 안동 김씨 문중은 정교한 지도를 군사 기밀로 여기고 지도를 빼앗으려 한다. 김정호는 지도를 권력가가 아닌 백성들의 것이라며 지도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사실 영화의 뚜껑이 열리기 전에는 흥선대원군과 김정호의 갈등을 식민사관으로 설명하지 않을까란 우려를 갖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에서 흥선대원군은 김정호보다 안동 김씨 세력과 더 큰 갈등을 겪으며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때문에 영화는 자극적인 갈등보다 전체관람가에 어울릴 법한 착한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보다는 마지막쯤 가슴이 떨려서 지도를 만들었다고 하는 김정호의 말이 그의 행동을 더욱 설득시킨다. 가족에게는 다소 무책임했지만 위대한 작품을 지켜낸 그를 예술가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 해야 할까. 다만 이와 같은 개인적인 욕구는 애민 정신 때문에 지도를 만들었다고 하는 앞의 이야기와 상충된다.
이외에도 김정호가 지도를 만든 이유로는 어린 시절의 사연도 나온다. 그는 지도가 사람을 죽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황당한 말처럼 보여도 과거엔 이런 일이 벌어지곤 했다. 산맥을 산 하나로만 표시한 지도를 보고 산을 오른 나그네는 그만 산맥 속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어린 시절 이런 비극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김정호는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강우석 감독은 정확한 기록이 없는 김정호의 삶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가 지도를 만든 이유를 여러 가지로 고심한 듯 보인다. 사람이 한 가지 생각만으로 행동을 결정하지는 않으며, 김정호 역시 하나의 생각만으로 지도를 만든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양한 사연들은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혹여나 관객들이 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할까봐 친절하게 과거 사연부터 개인적인 욕구, 사회적인 이야기까지 모두 다 집어넣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우석 감독은 영화에 기록된 역사와 현실을 모두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실제 대동여지도에는 독도가 없다. 때문인지 영화 속 김정호는 독도를 직접 만나기 위해 고생한다. 강우석 감독의 고민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9월 7일 개봉.
전자신문 엔터온뉴스 이주희 기자 leejh@entero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