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나혜석, 운명의 캉캉', 예술에 대한 열정 그리고 영원한 신여성으로서의 갈망

서머셋 모옴의 장편소설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 pence)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일생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런던의 주식중개인인 40대 주인공 스트릭랜드가 어느날 갑자기 가정을 버리고 파리로 가서 화가가 되면서 스토리는 시작된다. 그는 타히티 섬으로 가 오로지 그림에 대한 집착으로 모든 열정을 쏟아붓지만, 나병에 걸려 결국 죽는다.
모옴은 이 작품의 성공으로 유명작가의 반열에 확실히 올라섰지만, 고갱의 삶을 왜곡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달'은 본원적 감성의 삶에 대한 지향을, 6펜스는 천박학 세속적 가치를 암시한다고 알려져있다.

예술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스트릭랜드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치고 못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우리 문단에도 흔치 않았던 여성 화가를 소재로 한 주목할 만한 작품이 나왔다.
혼불문학상 수상자인 박정윤 작가가 최근 발표한 '나혜석, 운명의 캉캉'(푸른역사, 424p)이 화제작이다.
나혜석(1896~1948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학가'인 동시에 '근대적 여성운동가'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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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정윤은 6년간에 걸친 세밀한 자료조사와 검증을 토대로 나혜석의 일대기를 처절하게 복원해냈다.
나혜석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그리고 한국전쟁 전까지의 사회상도 세밀하게 담아냈다.
작품에서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영원한 신여성으로서의 갈망이 애절하게 드러난다.

'저는 길거리에서 찢겨 죽는 한이 있어도 틀린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여성들마저도 저를 외면하고 거울 앞에서 정신을 치장하고 웃고 있을 때, 억세고 줄기찬 나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었습니다. 제 삶은 실패했지만 정신은 실패하지 않았고,저는 실천했습니다.'
당대 수많은 예술가들과의 교류도 세세하게 그려져 흥미를 자아낸다. 소파 방정환, 춘원 이광수, 파인 김동환, 화가 이응노,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 조각가 구본웅 김복진, 성악가 윤심덕 등이 소설의 조연들로 등장한다.
박정윤 작가는 "당시 좀더 정확한 시대적 배경묘사를 위해 참고도서외에도 경성에 관한 사진집이나 기사, 기생도록, 미인도감까지 찾아읽었다"며 "사실을 토대로 모든 정황을 만들어냈다"고 밝혔다.
소설속에서 미로를 그리는 신비로운 남성인 하석진과 엘리제 마담, 소설을 끌어가는 주인공들이자 연인으로 나오는 윤초이와 독고완은 허구의 인물들이다. 또한 이광수와의 대면도 그랬을 것이라 추측해서 정황을 만들었다고 귀띔했다.
국내 여성작가들중 드물게 서사를 주 스토리로 삼는 작가 박정윤은 익히 알려진 예리하면서 탄탄한 문체로 순식간에 독자를 작품속으로 빨아들인다.
그녀가 그려낸 나혜석의 비극적 운명은 너무나 애잔해서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잠시 깊은 적막감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마치 '목로주점'의 여주인공 제르베즈의 비극적 운명에 넋을 놓을 수 밖에 없었던 독후 감상처럼 말이다.
박정윤은 에필로그에서 "어릴 적 언니들 책장에 꽂혀 있던 나혜석에 관한 얇은 책 한권에서 그녀의 자유로운 삶과 비극적인 운명에 덜컥, 발목을 잡혔다"며 "오랫동안 슬픔으로 남은 나혜석을 위해 할 수 있는 만큼 파헤쳤고, 그 후에야 비로소 슬픔이 평온한 저녁처럼 단정해졌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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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1971년 강원도 강릉출신.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2001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바다의 벽'이, 2005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가 당선됐다. 2012년 장편소설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 창작집 '목공소녀'(2015)와 경장편소설 '연애독본'(2015)이 있다.


한동안 읽을 책을 고르지 못해 고민하던 독서 애호가라면 '나혜석, 운명의 캉캉'이 본원적인 감성의 갈증을 해갈시켜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나성률 기자 (nasy23@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