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과기계부터 정책국감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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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일동은 시분할 전전자교환기(TDX) 개발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지금으로부터 33년 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연구진이 기술개발에 실패한다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며 쓴 서약 내용 일부다. 고인이 된 최순달 장관과 현재도 IT 분야에서 활동 중인 양승택 장관 등이 그날 현장 주역이다.

ETRI 원장이 TDX 예산안을 기획해 체신부를 찾았더니 당시 오명 차관이 “너무 적다, 이것 갖고 되겠냐”며 다시 올려 써오라 했다는 실화도 있다. 이렇게 5년간 밀어준 예산이 240억원이다. 1982년 당시 짜장면 값이 평균 350원이었고 우리나라 1년 예산이 8조5000억원가량이었다. 이를 올해 예산 규모로 역산해 비중을 따져보면 단일 프로젝트에 1조원가량을 쏟아부은 셈이 된다.

1992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64M DRAM은 우리나라 휴대폰, TV, 가전제품이 세계 시장을 장악하는 원동력이 됐다. 당시 초고집적반도체 기술공동개발안은 대통령이 최고 결재권자였을 정도로 국가 관심사였다.

1996년 우리나라를 ‘이동통신 강국’으로 만든 ‘코드분할 다중접속(CDMA)’ 개발 신화도, 2003년 연구개발을 시작해 3년 만에 개발 완료한 와이브로도 쉽게 이루어진 것은 없다. CDMA는 ETRI 내 ‘작전본부’까지 설치하며 올인해 얻은 결과물이다.

20~30년이 지난 지금, 출연연 R&D에 더는 비장함은 없다. 그저 오전 9시 출근해 오후 6시 퇴근하는 직장인이 있을 뿐이다.

한국화학연구원 P박사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명절을 제외하고 연구실에 살면서 도시락을 하루 네 개씩 싸가지고 다니는 연구자도 없다. 밤을 낮처럼 밝히며 일하는 사람이 없다.

연구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밤에 출연연구기관을 찾는 장차관도 없다. 서정욱 전 과기부장관은 예고 없이 KAIST를 밤늦게 방문해 흡사 군에서 실시하는 작전연습 같은 ‘CPX’가 걸리기도 했다. 전부 옛날 얘기다.

정부도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다. 1990년대 후반 출연연 역할이 수명을 다했어도 새로운 설계와 미션을 정해 시행하는 데 소홀했다. 꼬인 매듭을 풀지 못한다면 누군가는 단호하게 잘라내서라도 해결했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여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론대로만 따라가는 것이 ‘민주주의’는 아니기 때문이다.

국감 시즌이 무르익고 있다. 17~18일 이틀간 출연연 본산인 대덕에서 현장 국감이 실시된다. 기관장 불러 ‘혼’내기보다는 서로 머리를 맞대는 국감으로 가야 한다. 출연연 R&D 혁신방안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논의해보자.

“독일 프라운호퍼는 연구비를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문제 삼느냐”는 그런 질문이 쏟아져야 한다. 과학기술계는 누구를 비난하기보다는 격려와 칭찬이 있는 국감이 필요하다.

인센티브나 이직, 비정규직 등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지만 신선한 이슈는 아니다. 20~30년간 닳고 단 이슈 제기보다는 제대로 된 정책 국감을 하자. 그걸 해결할 능력과 여건이 안 된다면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의원들이 밤에 출연연을 찾아 막걸리 한잔 놓고 서로를 격려하는 ‘소통’문화부터 만들어보자. 현장서 함께 굴러봐야 뭔가 몸에 와 닿지 않을까. ‘조지는 게’ 능사가 아니다. 정책국감으로 가야 제2의 ‘TDX’나 ‘CDMA’가 나올 수 있다.


박희범 전국취재팀장 hb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