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3주년 특집] 전자신문 33년…ICT코리아 살아있는 역사

혁신의 성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미래를 예측한 자는 거대한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그 미래는 이내 과거가 됐다. 승자는 매순간 더 큰 도전에 직면했고 안주는 곧 도태로 이어졌다. 전자신문이 창간부터 조명해온 산업 역사는 환호와 눈물이 공존하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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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5월 12일 오전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 등 삼성 경영진을 청와대로 초청해 중국 CDMA사업에 삼성전자가 참여하게 된 일을 축하했다.

지난 수십년 동안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변화의 격류 속에서 수많은 기업이 흥망성쇠를 겪었고 전자신문은 그 현장을 지켰다. 지난 33년간 전자신문이 기록한 영욕의 순간을 되짚어 봤다.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1982년, 우리나라가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통신에 성공하며 인터넷 시대 출발을 알린 그해 전자신문(당시 전자시보)이 창간했다. 이후 우리나라 전자 산업은 일대 혁신을 맞는다.

1983년은 메모리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대한민국 반도체 신화 서막이 오른 해다. 12월 1일 삼성반도체통신(1988년 삼성전자와 합병)은 국내 첫 64K D램 개발을 알렸다. 세계 반도체 업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시곗바늘을 돌려 3월, 삼성은 그룹 차원에서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다는 선언문을 전격 발표했다. 이병철 회장의 ‘도쿄 구상’이 한 달 만에 사업화로 구현됐다. 64K D램 개발 착수 6개월 만에 생산·조립·검사까지 모든 공정을 완벽하게 이뤄냈다. 당시 일본 미쓰비시연구소는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삼성 반도체 사업 불가론을 내놓을 정도로 해외 시선은 곱지 않았지만 이를 일축했다.

삼성은 1994년 8월 256M D램 개발에도 성공하며 반도체 사업에 나선 지 11년 만에 세계 정상 자리에 올랐다. 시장을 선도한 일본 기업과 기술 격차를 6개월 이상 벌린 또 하나의 기적으로 평가받는다.

글로벌 TV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한 저력도 이 시기에 다졌다. 1982년 우리 기업은 컬러TV 해외 생산에 나서며 글로벌 기업 기반을 마련했다. LG전자 전신인 금성사, 한국나쇼날, 아남전자 수출 규모는 1978년 9370만달러로 급증했다 이듬해 7200만달러로 떨어졌다. 주력 시장인 미국이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자 자율수출규제를 요구한 결과다. 보호무역주의 규제를 피하려 현지 생산 필요성이 커졌고 금성사가 첫발을 뗐다. 미국 앨라배마에 현지법인을 설립하며 미국 시장 공략에 나섰다. 삼성전자도 포르투갈 현지 투자로 유럽 생산체제를 확보했다. 두 기업은 해외생산기지 다각화에 주력하며 오늘날 글로벌 기업 면모를 갖췄다.

폭발적 전자 산업 성장에 힘입어 전자신문이 일간으로 전환한 1990년은 PC 일반 가정 보급이 본격화됐다. 통신·게임 등 새로운 성장 산업도 뿌리를 내리며 새로운 성장동력이 확보됐다.

이동통신 시장 태동과 성장은 한걸음에 이뤄졌다. 1996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이 세계 최초로 CDMA 방식 서비스를 시작하며 국내 이동통신 시장은 일대 변혁기로 접어들었다. 1997년 한국통신프리텔(KTF), 한솔PCS, LG텔레콤 세 사업자가 PCS 신규사업자로 지정되면서 기존 한국이동통신, 신세기통신과 다섯 사업자 경쟁구도를 형성했다. 이동전화 시장은 폭발적 성장을 거듭했다. 1999년 9월 이동전화 가입자 수는 2013만명으로 늘어나 유선전화 가입자 수를 추월했다. 우리나라 통신 시장에 이동전화가 도입된 지 11년 5개월 만이다.

이제는 공룡이 된 게임 산업이 태동한 것도 이때다. 1996년 넥슨이 천리안에서 ‘바람의 나라’ 서비스를 시작하며 우리나라 게임산업 신호탄을 올렸다. 인터넷 과금이 이뤄지면서 이듬해 PC방이 들어섰고 ‘디아블로’ ‘스타크래프트’가 등장해 돌풍을 일으켰다. 2010년 우리나라 온라인 게임 매출액은 4조7673억원, 2012년 10조원 규모로 점프한다.

2000년 닷컴열풍이 한창인 당시 인터넷 검색포털 네이버와 온라인게임 서비스 한게임이 합병을 택했다. 우리나라 인터넷 지배자인 NHN의 시작이었다. 야후, 다음 등 막강한 선두주자에 가려진 막내 기업은 검색과 게임에 기반을 두고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며 서서히 독주체제를 갖춰나갔다.

◇논란과 위기, 새로운 기회

지난해 영업이익 5조원 벽을 깬 하이닉스는 ‘저니맨(Journeyman) 신화’ 대표 기업이다. 2012년 SK그룹에 둥지를 튼 뒤 사업이 회복세로 돌아섰고 대규모 투자 여력을 갖추며 성공적 인수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과거 하이닉스 모태인 LG반도체가 현대전자로 넘어갈 때는 잡음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1998년 김대중정부는 숙원인 재벌개혁에 나선다. 표본으로 대기업 간 빅딜을 추진했고 LG반도체를 지목했다. 1999년 4월 현대가 LG반도체 지분 59.9%를 2조5600억원에 인수했다. 인수 대금 일부를 데이콤 지분으로 지급하면서 LG전자는 바라던 데이콤을 얻었다. 언뜻 성공적 빅딜로 비쳐질 수 있지만 결과에는 물음표가 붙는다. 1년 만에 현대전자는 자금난에 빠졌다. 인수자금을 마련하려 발행한 회사채에 발목이 잡혔다. 반도체 산업 생존조건인 신규투자가 어려워졌고 이는 곧 경영난으로 이어졌다. LG도 데이콤 정상화에 대규모 자금을 쏟아부으며 고전을 이어갔다.

2001년 현대전자는 결국 채권단 손으로 넘어간다. 사명은 하이닉스로 바뀌었고 10년간 채권단 공동관리를 받다 SK텔레콤을 새 주인으로 맞았다. 이른바 빅딜 논란으로 불리는 사건은 정부 시장 경제 개입 대표 사례로 꼽히며 지금까지 회자된다.

2005년은 IT기업에 정부 규제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KT에 단일기업으로 사상 최대인 1159억7000만원 과징금을 부과했고 다른 이동통신 기업도 연이어 철퇴를 맞았다. 공정위는 마이크로소프트(MS)본사와 한국법인에 ‘시장 지배적 지위 남용’이라는 명목으로 시정명령과 과징금을 부과하며 산업 전체로 규제 범위를 확대했다. 관련 부처와 더불어 공정위가 관리감독에 나서면서 이중규제 논란이 벌어졌다.

2000년대 끝자락을 장식한 7·7 분산서비스 거부 공격, 이른바 DDoS 공격은 우리나라 보안 실태 민낯을 그대로 보여줬다. 정체불명 사이버테러리스트 공격으로 청와대, 국회, 국방부 등 12개, 해외 14개 사이트가 일시에 마비됐다. 다음날 국내 16개 사이트가 다시 접속 불능 상태에 빠졌다. 공격 받은 쇼핑몰 사이트는 영업중지로 수십억원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은 인터넷 일변도 사회에서 보안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같은 해 11월 아이폰 상륙으로 이동통신 시장은 일대 변혁기에 접어들었다. 2년 전 미국에서 먼저 출시했지만 파급을 우려한 국내 통신사는 아이폰 도입을 늦췄다. 아이폰과 앱스토어 조합은 그 자체로 플랫폼이 되기 때문에 우리나라 이통사 부가가치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았다. KT가 먼저 용단을 내렸다. 아이폰 도입 이후 우리나라 이통사 수익은 줄었다. 하지만 이통사 입맛에 따라 움직인 시장 구도가 깨졌고 삼성전자 등 휴대폰 제조사도 제품 개발 투자를 확대하며 오늘날 경쟁력을 확보했다.

◇뒤바뀌는 생태계…생존키워드는 혁신

2000년대 말부터 급속히 진행된 스마트폰 보급은 인터넷, 모바일 생태계를 뒤흔들었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일컫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는 수천만 사용자가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장점이다. 특정 사건을 개인이 SNS에 올려 뉴스보다 먼저 소식을 전하며 뉴미디어로서 면모도 갖췄다. 정치 참여 도구로, 기업 마케팅 툴로, 문화를 전파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부상했다. 커뮤니케이션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혁명으로 일컬어진다.

유통 시장도 일대 혁명을 맞았다. 전자상거래 시장은 지난해 1조6000억달러(약 1792조원) 규모에서 2020년 3조4000억달러(약 3804조원)로 매년 15%씩 늘어날 전망이다. 국경도 사라졌다. 온라인을 이용한 국경 간 거래(해외직구) 시장은 연 평균 최고 27%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2014년 2300억달러에서 2020년 최소 1조달러(약 1119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관련 분야에서 아직 이렇다 할 스타기업을 배출하지 못하는 것은 숙제다. 과거 누구나 들고 다니던 MP3 플레이어 등 기기가 모두 모바일기기로 흡수되면서 오히려 관련 산업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연매출 170조원의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그룹 성공스토리는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마윈 회장은 1995년 단돈 2만위안(약 350만원)으로 홈페이지 제작업체를 창업해 쇼핑몰 ‘타오바오’,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알리바바’ 등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대부호 반열에 올랐다. 바뀐 인터넷, 모바일 환경에 통찰력이 없었다면 알리바바 신화는 탄생할 수 없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최초들’의 역사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스마트폰을 쓰는 요즘 세대가 최초 휴대폰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모르긴 해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1988년 삼성전자가 국내 최초로 선보인 자체 개발 휴대폰은 투박한 외모와 벽돌 만한 크기 탓에 이름에 걸맞지 않게 휴대하기 힘들었다. 1990년대 피처폰 시대를 지나 2000년대 중반 이후 애플 아이폰 등장에 따라 지금 스마트폰 모습을 갖췄다.

휴대폰과 더불어 지금은 필수품이 된 PC는 처음 출시됐을 당시 가격 때문에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삼보전자엔지니어링이 개발해 1981년 출시한 국산PC 1호 ‘SE 8001’ 출시가격은 놀랍게도 1000만원에 육박했다. 일반 가정에서 쓰기에는 ‘넘사벽’이었다. 1983년 선보인 8비트 컴퓨터 ‘트라이젬 20XT’가 파격적 가격인 42만9000원에 출시되자 1년간 6000대가 기업·일반소비자용으로 본격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후 국내외 제조사는 16비트, 32비트급 데스크톱PC를 앞다퉈 출시했다. 1988년 32비트 보급형 PC가 쏟아지면서 우리 PC시장은 16비트 구도에서 빨리 졸업할 수 있었다.


최호기자 snoop@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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