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보르도, 세 번째 이야기–메독의 탄생과 1855 그랑 크뤼 등급표

김상미의 와인스토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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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이 메독(Medoc)이다. 그런데 메독은 보르도의 다른 와인 산지에 비해 훨씬 늦은 17세기에 네덜란드 상인들에 의해 개발된 곳이다. 이들은 당시 영국에서 인기를 끌던 보르도의 그라브(Graves) 지역 와인이나 포르투갈 와인과 대적할만한 와인을 만들어 팔 생각에 포도밭으로 적합한 자리를 물색 중이었다.

당시 메독은 지롱드 강가에 위치한 드넓은 습지로 가축에게 먹일 풀을 생산하던 곳이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이 습지에서 물을 빼내자 뜻밖에도 포도를 기르기에 최적인 자갈밭이 드러났다. 이곳이 최상의 테루아임을 알아본 몇몇 사람들은 바로 땅을 사들였고 오브리옹처럼 자신들의 이름을 붙인 와인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바로 우리가 지금 보르도 최고 명품이라 일컫는 라피트(Lafite), 라투르(Latour), 마고(Margaux), 무통(Mouton)이다.

메독의 와인이 고급으로 인정받고 인기를 끌면서 보르도 와인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됐다. 그러자 와이너리들은 자신들의 와인에 테루아 외에도 전통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전통을 더욱 빛내기 위해 와이너리 이름 앞에 샤토(Château)라는 말을 붙였다. 샤토는 프랑스어로 성이나 저택을 의미하지만 당시 와이너리들 중에는 성이나 저택을 소유한 곳이 드물었다. 그들에게 샤토는 17세기 말부터 이어온 자신들의 전통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상징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그 표현을 실제로 보여주기 위해 고풍스러운 저택을 짓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 이후부터였다.

1855년 프랑스는 파리 박람회를 개최했다. 이때 보르도 와인을 좀 더 체계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자 보르도 상공회의소와 와인상 연합회는 보르도의 우수 샤토, 즉 그랑 크뤼(Grand Cru)를 뽑는 일에 착수했다. 우수 와이너리를 선정하는 것은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으므로 상공회의소와 와인상 연합회는 샤토가 지닌 전통과 그 샤토의 와인이 그동안 팔려온 가격대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들은 그 두 기준이 샤토의 신뢰도와 일관성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라 여겼다.

선정 결과는 1855 그랑 크귀 등급표로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는 메독에서 레드 와인을 생산하는 샤토와 보르도 남쪽에 위치한 소테른(Sauternes)에서 스위트 와인을 생산하는 샤토만 포함됐다. 소테른의 샤토 중에는 디캠(d’Yquem)이 유일하게 최우수 등급(Premier Cru Supérieur)으로 선정됐고 이하 25개 샤토가 1등급과 2등급으로 선정됐다. 메독의 샤토들 중에는 58 개가 1등급부터 5등급까지 등급이 매겨졌는데 1등급으로는 라피트, 라투르, 마고 그리고 오브리옹(Haut-Brion)이 선정됐다. 오브리옹은 메독이 아닌 그라브에 위치한 샤토지만 워낙 품질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855 그랑 크뤼 등급표는 예상보다 훨씬 파급력이 컸고 그랑 크뤼 샤토의 와인을 찾는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매출이 늘자 그랑 크뤼 샤토들은 등급표의 수정을 원하지 않았고, 그들의 강력한 반대가 이어져 160년이 지난 지금까지 등급표가 수정된 적은 딱 두 번 뿐이었다. 첫 번째는 실수로 누락된 샤토 캉트메를(Cantemerle)을 1855년 말 5등급에 포함시킨 것이었고 두 번째는 무려 118년이 지난 1973년 샤토 무통 로쉴드(Mouton-Rothschild)가 2등급에서 1등급으로 승격된 것이었다.

무통 로쉴드가 1등급으로 승격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무통은 1853년 영국 출신 유대인인 내서니엘 드 로실드(Nathaniel de Rothschild)가 사들였는데, 당시에는 1등급이 되고도 남을 무통이 2등급으로 선정된 것이 영국인인 로실드로 소유주가 바뀐 것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게다가 내서니엘의 사촌인 제임스 마이어 로실드(James Mayer Rothschild)가 1868년에 샤토 라피트를 구입해 자동으로 그랑 크뤼 1등급 와이너리 소유주가 됐으니, 내서니엘의 억울함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 한을 풀어준 이가 내서니엘의 증손자인 필립 드 로실드(Philippe de Rothschild) 남작이었다. 그는 끊임없는 로비와 노력으로 1973년 118년간 꿈쩍도 하지 않던 1855 그랑 크뤼 등급표를 바꾸는데 성공했고 결국 2등급에서 1등급으로 승격됐다. 그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73년 무통 로실드 레이블에 ‘나는 1등급이다. 나는 2등급이었다. 무통은 변하지 않는다. (Premier Je suis. Second je fus. Mouton ne change.)’라는 말을 적어 넣었다. 1973년은 피카소가 타계한 해이기도 해서 피카소가 그린 바카날(Bacchanale, 마시고 노래하는 축제)이 무통의 레이블을 장식하고 있는데, 이 그림과 필립 남작의 문구는 묘하게 어울려 그의 굳은 의지와 자존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1855 그랑 크뤼 등급에 포함된 샤토냐 아니냐는 지금도 메독의 레드 와인 가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지만 워낙 오랫동안 변화가 없었던 탓에 그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샤토의 소유주도 바뀌고 포도밭도 확장되는 등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르도에서도 등급표를 갱신하려는 움직임이 여러 번 있었고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를 비롯한 몇몇 와인 평론가들이 자신들이 비공식적으로 선정한 보르도 100대 와인 리스트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아직도 1855 메독 그랑 크뤼 등급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도 메독 와인을 살 때 ‘Grand Cru Classe en 1855’라는 문구가 레이블에 보이면 그 와인을 무조건 신뢰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랑 크뤼 샤토들이 품질 유지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랑 크뤼 샤토라고 해서 그 품질을 너무 맹신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1855 그랑 크뤼 등급표. 그것은 와인을 즐기는 이에게는 하나의 참고사항일 뿐이다. 다양한 와인을 마셔보고 자신의 취향이 생겼을 때 자신만의 와인 등급표를 만들어 보는 것. 그것이 오히려 와인 애호가에게는 더 뜻깊은 일이 아닐까.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필자소개/ 김상미

1990년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우리나라 통신 1세대로 20여년간 인터넷과 통신 회사에 근무하였다. 음악서비스 멜론의 서비스기획팀장을 마지막으로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유럽에서 근무하며 와인을 좀 더 쉽게 접하게 되었다.

2012년 회사를 그만두고 와인에 올인, 영국 Oxford Brookes University의 Food, Wine & Culture 석사과정에 입학하였고 그녀가 쓴 ‘An Exploratory Study to Develop Korean Food and Wine Pairing Criteria (한국 음식과 와인의 조화)’는 석사논문으로는 이례적으로 2014 Global Alliance of Marketing & Management Associations (GAMMA) Conference 에서 소개 된 바 있다.

최근에는 영국 런던의 세계적인 교육기관인 Wine & Spirit Educational Trust (WSET)의 최고 등급인Diploma를 취득했다.

현재 주간동아에 와인 칼럼을 연재 중이며 KT&G 상상마당의 홍대 와 춘천 아카데미에서 와인을 가르치고 있다. 늘 한국인의 입맛과 음식에 맞는 대중적인 와인을 찾고 공유하는 일에서 가장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