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규범과 규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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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007시리즈’는 1962년 1탄 ‘살인번호’를 시작으로 23탄 ‘스카이폴’까지 매회 박진감 넘치는 첩보물의 묘미를 보여줬다. 이야기는 적색국가나 테러단체와의 첩보전에서 첨단 기술이나 무기 유출을 막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새삼 007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영화처럼 실제로 전략물자 불법 이전으로 대량살상무기(WMD)가 제작돼 인명과 재산에 피해를 주고 있어서다.

지난해 4월 미국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수백명의 사상자를 낸 폭탄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폭발물은 못과 베어링 등을 담은 압력밥솥에 타이머를 연결한 조잡한 물건이었지만 267명의 사상자를 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백령도와 삼척 등지에서 발견된 정찰용 무인항공기에 개인용 카메라가 장착돼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데 사용됐다.

얼마전 한 협단체에서 “정부가 기업 규제를 완화하는데 전략물자 허가 제도도 철폐해야 하는 규제가 아닌가”하는 의견이 나왔다. 전략물자는 소비용이나 산업용으로 사용되는 재료·설비지만 테러단체에 이전되면 WMD 제작용으로 전환될 수 있다. 우리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공동 규제한다.

전략물자 관리는 미국 등 주요국이 지난 1949년 ‘대공산권수출통제위원회’를 결성하고 동구권에 무기 수출을 금지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탈냉전 이후 이라크 화학무기 생산, 파키스탄 핵무기 개발, 북한 미사일 및 핵 개발, 민족주의와 종교 갈등으로 인한 내전이나 테러 등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수출통제체제가 결성됐다.

2001년 미국 뉴욕을 강타한 9.11테러는 세계 어느 지역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을 극명히 보여준 사례다. 이를 계기로 유엔은 안보리결의 1540호를 선포하고 전략물자 관리를 국제수출통제체제 회원국 뿐 아니라 유엔 가입국 모두의 의무로 확대했다.

우리나라도 1987년 ‘한미 전략물자 및 기술자료 보호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하면서 전략물자 수출 허가제도를 도입했다. 4개 국제수출통제체제에도 모두 가입했다.

최근 과학기술 발달로 전화나 팩스 등 무형이전방식(ITT)으로 기술이 이전되고, 그 기술이 첨단 무기 제조에 사용되는 등 무역안보 환경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올해 무형의 기술이전을 방지하기 위한 허가제도를 도입, 불법 기술이전을 막고 있다.

우리나라도 전략물자 관리 인식이 확산되면서 전략물자관리원에 접수된 수출허가 사전판정 신청 건수는 2011년 4000건에서 올해 10월 1만2000건으로 3년만에 세배 이상 증가했다. 200여개 기업을 자율준수 무역거래자로 지정, 자율적으로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전략물자 관리는 미국·영국·일본 등 주요국과 비교하면 아직 초라한 수준이다.

전략물자 관리는 무역의 중요한 리스크 관리 수단이다. 기업이 관리를 소홀히 해 수출 품목이 전략물자로 확인되면 주요국과 거래하기 어려워지고 처벌을 받는다. 해당 기업은 큰 손실을 입기 때문에 전략물자 관리는 리스크를 방지하는 의미를 지닌다.

전략물자 관리는 우리만의 규제가 아닌 세계의 규제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도로교통법을 준수하듯이 전략물자는 무역의 도로 위에서 지켜야 하는 규범이다. 규범을 지키는 것은 기업의 신뢰와 재산을 보호하는 더 나은 경영을 위한 것이다.

규제는 국민이나 기업에 필요악인 것도 있지만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이 생명이나 재산을 지키는 안전규제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전략물자 관리도 기업을 불편하게 하는 규제지만 인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규범이라는 점에서 우리 기업은 체화하고 준수해야 한다.

이동근 전략물자관리원 이사장 seh@korcha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