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틸라를 흔든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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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눌지는 치술공주와 함께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 앞에는 억센 복면을 한 사내가 무릎을 꿇은 채였다. 그는 이름도 없고 인생도 없는 사내였다. 하지만 살고싶은 사내였다.
“복호는 죽지 않았는가?”
왕 눌지의 음성은 왕 다웠다. 트집을 잡을 수 없는 완강한 위엄이 있었다.
“죽었다고 할 수도 없고 살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왕 눌지는 숨을 삼켰다. 숨소리 조차 그의 속내를 들킬 듯 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자잘한 웃음이 수런거렸다. 치술공주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 또한 속눈썹을 잠자리 날개처럼 떨었다.
“너는 왜 복호를 보호하지 못했느냐?”
억센 복면의 사내는 자신의 살고싶음을 쉽게 부서트릴 깜은 아니었다.
“죽여주십시오.”
“죽여주마.”
억센 복면의 사내는 살고싶음의 흉흉한 고비를 죽어라 떨쳐야했다.
“살려주십시오.”
그러자 치술공주가 고운 목소리로 왕 눌지에게 고했다.
“그 먼 이역 땅에서 복호 왕자님을 잠시 놓친 것 뿐인데, 용서해주십시오. 청을 드리옵니다.”
치술공주는 찬란한 젊음으로 웃었다. 눌지는 그녀의 눈빛을 욕정으로 받았다.
“네가 살 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그러자 억센 복면의 사내는 살고싶음을 얻은 안도감으로 왕 눌지를 열광했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다시 그리로 가라,”
억센 복면의 사내는 멍한 표정으로 왕 눌지를 보았다.
아틸라와 훈의 전사들이 이동하는 모습은 어디에서나 보였다. 그들은 모두 검은 말을 타고 움직였다. 멀리서 보면 검은 폭풍이 지나가는 듯 했고 그들이 내지르는 희한한 소리는 벌레들, 동물들마저 도망갈 정도였다. 그들은 살아있는 지옥이었다. 움직이는 지옥이었다.
저 멀리, 서로마제국의 궁정이 보였다. 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정이었다.
“가져와라.”
아틸라가 명령하자, 전사들은 동로마제국 사신들의 싸움없이 피에 찌들은 십여 개의 머리통을 하나로 엮은 꼬챙이를 들고 왔다.
“에르낙.”
에르낙이 말을 타고 다가왔다. 그는 언제나 아틸라 옆에서 눈물겨운 자세였다.
“나보다 먼저 보내라.”
에르낙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훈의 전사들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희한한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벌써 달려나가고 하나도 없었다. 훈의 전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서로마제국은 말발굽소리와 화살비에 몸서리치며 곧 당도할 전에 본 적 없는 위험한 정체에 파멸할 것이다.
아틸라는 훈의 전사들이 사라진 그 자리에서 피에 젖은 사내들의, 느닷없는 자손이 창조할 역사의 새로운 형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순간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있었다. 멀리 서로마제국의 궁정은 잿빛 폭풍 속에 갇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사흔과 에첼, 오형제는 머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떨어지는 별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거짓말 같았다. 헛것 같았다. 별이 사라지자 드디어 빛 하나 없는 완벽한 밤이 왔다. 달도 없었다. 별도 없었다. 사막 폭풍은 아주 잠시 쉬고 있는가? 천 개의 동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밤과 동굴은 그들의 정념과 애욕을 기막히게 섞어 동굴이 곧 밤이고 밤이 곧 동굴이었다.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이요. 빨리 보여야 할텐데요.”
오형제는 젖을 보채는 아이들처럼 들떴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보지요.”
에첼도 사실 조급했다. 그들은 몇 시간을 그렇게 동굴만 바라보았는지 모른다. 누구 먼저랄 것 없이 깜빡 잠이 들었다. 사막 모래가 몸 속으로 쳐들어와 내장을 후벼파고 있었다. 사막 모래가 내장을 갉아먹고 있었다. 먼저 미사흔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났다. 밝음도 없었고 어둠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에첼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형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막 폭풍은 잠시 쉰 것이 아니었다. 아주 헐겁게 다가와 딴딴하게 그들을 잠식하고 있었다. 말이 소리가 되어 나가지 않았다. 사막 폭풍의 무게는 뼈를 모래로 만들 작정이었다. 철저하게 불순의 아수라였다.
그때였다. 저쪽 어디선가 희미한 빛줄기 하나가 어스름 기어나오고 있었다. 황금 빛깔의 빛줄기는 생명을 살리려는 동아줄이 되어 자꾸 다가오고 있었다.
“아.”
미사흔은 모래가 가득한 입을 열었다. 사막 모래가 혀를 획 할퀴었다. 미사흔은 손을 뻗었다. 그 빛줄기를 만지고 싶었다. 빛의 부스러기라도 만지고 싶었다. 빛줄기는 사막 폭풍이 비켜주는 자리를 따라 조심히 움직이며 미사흔에게 도착했다. 미사흔의 손과 만났다. 미사흔의 손을 칭칭 감았다. 미사흔은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물은 모래가 되어있었다.
아틸라는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서로마제국 궁정을 덮은 잿빛 폭풍의 꼭대기에 황금 빛깔 빛줄기가 가늘게 꾸물거렸다.
“아, 찾았구나. 미사흔이여.”
아틸라는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역사의 질주를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 다가왔다. 아틸라와 정반대의 세상에서 건너 온 그를 보았다. 언젠가는 친구였지만 또 언젠가는 적이 될, 또 하나의 당장의 탐욕이었다.
글 소설가 하지윤 lif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