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틸라를 흔든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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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저녁 노을은 오늘따라 파국의 질감이었다. 어쩌면 저녁 노을이 덮고 있는 지금의 땅은, 얼마 후 들쑥날쑥 잘린 핏줄의 머리통과 애당초 예의란 없이 경황없이 베어버린 크고 작은 팔다리들과 인간의 몸에서 살기를 허락받았던 한 떼의 내장들이 둥둥 떠다니게 될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끈덕지게 창궐하였던 그들의 거칠고 위험한 열망은, 지금의 땅을 덮고 있는 저녁 노을을 다시 덮으며, 진짜 인간의 풍경을 만들 것이다.
‘황금검을 빨리 찾으라. 찾으라.’
아틸라는 보이지 않는 미사흔을 찾았다. 그는 위대한 제국을 완수하는 것만이 진짜 인간의 풍경에 역사라는 지위가 부여된다고 믿었다.
“호노리아 공주가 왔다. 공주가 왔다.”
신생(新生)의 갈채를 기다리고 있는 아틸라에게 스스로 외로운 잿빛 노을은 도통 힐다를 떠올리게 했다. 힐다는 항상 아틸라에게 눈빛으로 말하곤 했다. 그녀의 눈빛은 막힘없이 아틸라의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전투에서 ‘아아아’ 괴성만 지르던 그는 힐다와 한 마디 나눔도 없이 사랑을 나누었다.
“호노리아 공주가 왔다.”
훈의 전사들은 끓는 기름이 되어 지랄이었다. 전사들은 그냥 여자도 아닌 서로마제국의 공주를 보기 위해 으르렁거렸다. 전혀 치장도 없이 모두 사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 험악한 수컷들이었다.
“공주를 보다니, 공주야. 공주.”
“색녀라던데?”
“남자없이 하루도 못자는 여자래.”
“이쁠까?”
“안이쁘면 어때? 공주잖아. 공주? 공주는 거기도 다르게 생겼을거야.”
“공주도 여자야. 엎어지면 다똑같아.”
그런데 마차가 없었다. 귀한 세레스의 능라이거나 린넨(Linen)일 것이었다. 보랏빛으로 물들인 능라와 린넨을 덮은 마차는 고귀한 긍지를 드러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호화로운 마차가 없었다. 꼬라지가 허여멀건 피등한 녀석들이 꼬라지도 허연 말을 타고 나타났다. 훈의 전사들은 당혹한 얼굴이었다.
오에스테스가 무기를 들고 나섰다.
“죽기좋은 날에 왔군.”
동로마제국의 사신은 매우 건방진 표정으로 내렸다.
“한 때는 서로마제국의 명문귀족이었던 분이 이제는 아틸라의 똥구멍이나 핥고 있다면서? 하하하.”
뒤에 도열해 있던 동로마제국 사신 일행도 곧 닥칠 어이없는 궤멸을 모르는 채 헛헛 웃었다.
“아틸라를 만나러 왔소.”
순식간에 훈의 전사들이 무기를 꺼내들었다. 지옥의 문이 열린 순간이었다. 곧 살육의 장으로 바뀔 찰나였다. 사신은 애써 묵묵히 있었다. 훈의 전사들은 무기를 더 높이 들었다. 허공에서 서로의 무기를 충돌시켰다. 인간의 심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그 소리에 당장이라도 숨이 멎는 듯 했다. 또 희한하게 내지르는 들짐승소리는 간담을 서늘케했다. 사람을 토막토막 먹을 치울 소리였다. 사신(使臣)은 누가 들을까 겨우 희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해 집중되어 있었다.
“아틸라 제왕님을 만나러 왔소.”
이번엔 훈의 전사들이 동로마제국 사신들을 목조르듯 에워싸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살육의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때였다. 훈의 전사, 누군가가 동로마제국 사신 중 하나의 목을 장난처럼 댕강 날려버렸다. 핏줄이 길게 푸르르 떠는 머리통이 사신 앞에 또르르 굴러왔다.
“날씨 좋다.”
훈의 전사들이 외쳤다. 모두 누런 이빨로 우악스럽게 웃었다. 이곳은 결코 이승이 아니었다. 사신의 턱은 가차없이 흔들렸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조아렸다.
오에스테스는 그제서야 사신 앞에 큰 걸음으로 섰다.
“아틸라 제왕님은 하찮은 동로마제국 사신을 직접 만나지 않는다.”
사신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에스테스가 그의 머리통을 칼로 지긋이 눌렀다.
“말하라.”
“테오도시우스 황제께서 호노리아 공주님을 서로마제국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러니 아틸라 제왕님도...”
사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콘스탄티우스, 에데코, 에르낙이 사신의 불길한 말뽄새 틈새를 찾아들었다.
“누구 맘대로 돌려보내?”
결코 타협하지 않는 사나이들은 종말(終末)을 들고 나타났다. 사신은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얼굴을 천으로 감싸고 동굴 하나 하나 들어가, 잿빛 연기를 끄고 어딘가 숨겨두었을 황금검을 찾느라, 정신은 멀고 아득했다. 동굴 하나 하나는 그리 크지 않았다. 사람 두 셋이 들어가 몸을 누이고 목을 축일 정도였다. 하나 하나의 동굴을 수색하고 옆의 동굴로 옆의 동굴로 이동하는 과정도 여간 위험했다. 실족하면 충분히 죽을 수 있는 높이였다.
“복호가 천 개의 동굴을 다 가졌던 아닐 것이다. 분명 연고가 있는 곳에 두었을 것이다.”
미사흔은 풀불 연기 기운에 눈이 뻘갰다.
“복호는 황금검을 신라로 가져가려 했을까요? 아니면.”
미사흔은 에첼의 말을 딱 잘랐다.
“고구려로 가져가려 했을거다. 어차피 눌지는 복호를 살리려 했던 것은 아닐테고. 복호도 그것을 몰랐을리 없다.”
그때 동굴을 날아다니던 오형제가 야단하며 소리쳤다.
“동굴 벽에 이상한 그림이 있습니다.”
미사흔의 눈은 황금검의 그 빛깔이 들끓었다.
글 소설가 하지윤 lif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