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윤 작가의 아틸라, The 신라 제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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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로마의 문(門)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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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다는 느긋하게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횃불이 여기저기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블레다의 전사들은 십 여명이 아니었다. 더 많았다. 삼 십여명은 되어보였다.

“아직 어둡지만, 사냥하기에 딱 좋은 날씨다. 우리 고향은 늘 추웠다고 하지. 설산(雪山)을 보고 살았으니.”

블레다의 곁을 지키던 난장이 위글이 원숭이처럼 끼륵끼륵 웃었다. 그는 민머리였다. 하지만 민머리 위로 흰머리가 삐죽 몇 개 솟아있었다. 면상이 좋지않았다.

“이제 세상은 블레다 왕자님의 것입니다. 정복한 대부분의 땅을 블레다 왕자님의 직접 통치하시니, 앗차, 블레다 제왕님이십니다. 제가 왕자님 아기때부터 모시다보니 왕자님이라는 말이 입에 붙었습니다. 제왕님.”

블레다는 자신의 숙명적 종말을 아직은 알지 못했다.

“아틸라에게 알렸겠지? 오늘 나의 멧돼지 사냥을?”

“오늘 진짜 사냥감은 아틸라입니다. 멧돼지는 없습니다.”

위글이 또 끼륵끼륵 웃었다.

“아틸라는 불과 서너 개 부족의 땅을 다스리는 제후일 뿐입니다. 오늘 처치하시면 블레다 제왕님은 세상을 전부 갖게 되시는 겁니다. 축하드리옵니다.”

블레다가 음흉하게 웃었다. 입을 삐죽삐죽하더니 재채기를 연거푸 했다. 그가 여자생각이 간절하다는 것이었다.

“힐다를 데려와라,”

잠시 후, 힐다가 끌려왔다. 놀라운 미모였다. 훈족의 여인들과는 다르게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하얀 것이 이 세상 여자같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북쪽의 골족(Gauls)에게도 희귀하게 나타난다는 보랏빛 눈동자였다. 투명한 유리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세상을 다비추고 있었다. 신령스런 눈동자였다. 아틸라가 사랑한 눈동자였다. 블레다는 스스로 초원의 사나이라고 부르짖는 사내였고 그래서 제멋대로였다. 블레다는 힐다의 옷을 칼로 쭈욱 찢어내렸다. 그녀의 얼굴처럼 새하얀 젖가슴이 드러났다. 블레다는 발정난 수말처럼 힝힝거렸다. 계속 재채기를 해댔다.

“난 이런 피부를 안아본 적이 없다. 아틸라가 감히...나보다 먼저...”

그는 그 자리에서 힐다를 겁탈하려고 했다. 힐다를 엎었다. 힐다의 긴 치마를 들추었다. 그의 야만성은 주변을 의식하지 않았다. 블레다의 전사들이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려주었다.

“맷돼지입니다. 진짜 멧돼지입니다.”

블레다는 하던 짓을 멈추었다. 깜짝 놀랐다.

“멧돼지? 진짜라고?”

블레다는 힐다를 홀레붙던 개처럼 밀쳐버리고 말에 후딱 올랐다.

“나중에 아틸라 왕자님이 아시면 어떻게 할까요?”

“아틸라는 어떻게 알겠느냐? 내가 오늘 아틸라를 죽일거다.”

블레다는 맷돼지를 향해 멧돼지처럼 달려갔다.

“맷돼지부터 죽이고!”

미사흔은 에첼의 옷을 부랴 입히고 일단 몸을 숨기기로 했다. 미사흔의 귀에서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에첼은 자신의 윗옷을 부욱 찢어 미사흔의 귀를 감쌌다. 피를 멈추어야 했다. 아직 선도의 오형제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명사산의 사막 깊은 골짜기 속으로 숨어들었다. 명사산의 하늘은 별빛으로 찬란했다. 하늘에 빈 자리는 없었다. 여백이 없었다.

“이곳은 본래 흉노의 땅이었다. 시조 김일제의 처음이 시작된 땅이다.”

“저 많은 별빛이 바로 죽은 전사들이라니.”

에첼은 하늘의 치밀하게 자리잡은 별빛들을 겸허하게 쳐다보았다.

“왕자님도 나중에 저 하늘의 별빛이 되는거예요?”

에첼은 갑자기 어린 소녀가 되어버렸다. 미사흔은 에첼의 어깨를 힘주어 껴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잠깐 잠이 들었나보다.

사막의 밤은 달그림자를 안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날씨는 어마하게 차가워졌다. 그리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비파의 소리가 들렸다. 비파소리는 두 사람에게 자꾸 수작을 걸고 있었다. 떠나라 하고 있었다.

“아, 조상의 소리가 우리를 부른다. 비파는 우리 조상들이 이리저리 떠돌다 말 위에서 고향을 생각하며 부르던 노래였다. 이제 움직여보자.”

미사흔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일어나자마자 화살이 다시 획 스쳤고 그의 어깻죽지를 단번에 날렸다.

“꼴같잖다.”

미사흔은 휘청했다. 그러나 멈추어 있을 수는 없었다.

미사흔과 에첼은 부랴부랴 사막의 밤을 달렸다. 한치 앞도 안보였고 걸릴 것도 없었지만 쉽게 갈 수도 없었다. 말발굽이 사막의 모래속에 폭폭 빠졌다. 그저 막막했지만 그래도 밤을 달렸다. 그러나 사냥꾼들의 말발굽과 화살소리는 시끄럽고 요란한 푸닥거리 무당처럼 쫒아왔다. 지긋지긋하게 쫒아왔다.

“저들은 황금검을 원하고 있다. 그 검만이 위대한 제국을 건설할 제왕이 되는 운명의 검이니까.”

“황금검을 원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미사흔 왕자님이 제왕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에첼의 눈빛은 정염에 물들어 있었다.

아틸라가 말을 달릴 때, 그는 인간도 아니고 말도 아니었다. 인간이기도 하고 말이기도 했다.


글 소설가 하지윤 lif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