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대통령의 어울리지 않는 방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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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후 6개월 가까이 박근혜 대통령은 자초했건 뜻밖의 외풍을 맞았건 안팎의 각종 악재에 시달렸다. 때문에 지금껏 창조경제는 산업과 민생 현장에서 도무지 실체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아니 시간도 부족했고, 도저히 여력이 없었다고 이해한다.

그런 대통령이 개성공단 사태를 해결하기 시작한 근래 들어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올인하려는 모습이다. 광복절 기념사에서도 이 두 가지 화두를 하반기 핵심 국정 목표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광복절 다음날 대통령은 인천시 업무보고 후 남동공단 소재 인쇄회로기판(PCB) 업체인 세일전자를 찾았다. 지난 2004년 방문에 이어 두 번째다. 당시는 한나라당 대표 시절 4·15 총선 후 첫 민생 행보지로 택했다. 이번에는 대내외 현안을 수습하고 앞으로 중소기업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창조경제의 성과를 내는 데 힘 쏟겠다는 뜻을 피력하려 했을 것이다.

경제 살리기에 매진하겠다는 대통령이 첫 행선지로 중소 제조기업을 찾았다는 사실은 대수롭지 않다. 불현듯 실망감을 넘어 답답함이 밀려들었다. 대체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은 지금 중소기업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나 있을까. 알고 있었다면 아무리 모범적인 중소기업이든, 옛 방문의 인연이든 세일전자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일전자는 현 정부가 잘못하고 있는 현실에 맞닥뜨린 대표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최근 두 가지 현안만 보자. 우선 환경부와 정치권이 졸속으로 만든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의 직접적인 피해 영향권에 들어있다. 산업계가 우리나라 제조업의 근간을 뒤흔들 것이라며 엄청나게 우려하는 법들이다. 공교롭지만 세일전자가 생산하는 PCB는 화학물질을 가장 많이 다루는 업종이다. 연구개발과 생산 현장에서 온갖 화학물질을 밥 먹듯 취급하는 곳이다. 수많은 중소기업은 개정 화평법·화관법의 독소 조항을 아직 잘 모른다. 세일전자도 마찬가지였거나 알고 있더라도 대통령이 방문한 자리에서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을 것이다. 제조업의 족쇄를 채우는 법을 정부가 만들어놓고 당사자격인 중소기업 면전에서 잘하겠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조세 이슈다. 일반 국민은 최근 세제 개편안을 놓고서야 공분을 쏟아냈지만 중소기업은 이미 현 정권 출범 직후부터 곤욕을 치렀다. 창조경제 구현을 위해 재원을 확보하겠다며 수많은 중소기업을 조세 사범으로 몰아 유례없는 세무조사를 벌였다. 과연 이 정권이 중소기업을 위한 정부냐며 분통을 터뜨렸던 이유다. 그런 기업이 몰려 있는 곳이 바로 남동공단이다. 세일전자 또한 올해 세무조사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인근의 비슷한 기업들은 홍역을 치렀을 게 자명하다.

지금까지 행태를 보면 어쩌면 중소기업들의 뭇매를 맞아도 한참 모자랄 정부다. 산업 현장의 그런 고충을 알고도 세일전자를 방문했다면 뻔뻔함이고, 몰랐다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정권 출범 후 최고 가치로 내세웠던 경제 민주화도 어느덧 경제 살리기에 묻혀 버린 현실이다. 대통령이 아예 중소기업 현장을 찾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최소한 정부가 원성을 듣지 않을 상황에서 중소기업을 위해 잘하겠다고 다짐했다면 적어도 진정성 하나만은 통했을 법했다.


서한기자 hse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