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사랑이다(Design is Loving others)`
사람들에게 나의 상품 스토리를 들려주면 흔히 기술을 어떻게 리서치하는지, 어떻게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지 묻는다.
누구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라면 별도의 리서치가 필요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일상생활 속에서 제품에 관한 정보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나는 일상용품을 디자인하는 만큼 30여년 동안 살아온 인생 전부를 리서치에 할애했다고 할 만하다.
나는 일부러 사람이 많이 모이는 도심의 커피숍을 즐겨 찾는다. 북적대는 사람들 속에서 이노가 진행하고 있는 수많은 디자인 프로젝트를 생각한다.
방식은 이렇다. 머릿속에 책상을 하나 펼쳐둔다고 생각한다. 각 프로젝트의 키워드가 핀에 꽂혀 있다고 상상한다. 그 키워드를 프레임 삼아 일상을 액자 안에 담듯이 살펴보면 아이디어가 `탁` 하고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어떤 모양으로든 스케치를 한다.
그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의 생각과 같은 속도로 종이에 옮겨진다. 아니, 나타났다고 하는 편이 옳다. 머릿속에 있던 아이디어가 내 손을 빌려 그대로 종이 위에 드러났으니 말이다.
“모든 아이는 예술가다. 문제는 어떻게 어른이 되어서도 이를 유지하느냐다.” - 파블로 피카소
이런 발상의 순간을 이야기하면 다수가 “김영세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사실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상상가, 곧 `이매지너`로 태어난다. 아이를 키우거나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은 안다. 아이는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어른이 깜짝 놀랄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한다. 안타까운 점은 타고난 상상력은 불과 일곱 살만 되어도 급격히 사라진다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창의력의 부재를 제도권 교육의 문제로 지적한다.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서 제도권 교육을 거부하라는 말이 아니다. 늘 호기심을 갖고 엉뚱한 일을 상상했던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어린 시절 기억을 간직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일상 속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상상과 시뮬레이션을 한다. 문제는 그것을 현실로 끌어와 개선하는 이가 적고 현실화하는 과정에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는 데 있다.
사람들이 자기 외모를 향상시키기 위해 운동, 태닝, 성형수술을 한다. 나는 창의력도 일상 속에서 훈련으로써 향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두뇌 트레이닝 게임 같은 일차원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매지닝`이라고 이름 붙인 전략적 상상으로 가능하다.
나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디자인 제품을 선보였다. 어떤 제품은 업체의 의뢰를 받아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도중에 순간적으로 생각해낸 것도 있다. 집에서 의자에 앉아 쉬고 있다가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라 제품으로 발전시킨 것도 있다. 모두 다른 상황 같지만, 그 순간에는 모두 어김없이 `이매지닝`의 과정이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디어에 대한 확신과 추진력으로 그것을 현실화한 데 차별점이 있다.
◇수많은 `아내와 딸`을 위해 디자인하다
내 생각이 난관에 봉착한 것은 2005년 화장품 업체에서 콤팩트 케이스 디자인을 의뢰했을 때다. 내가 직접 사용한 적이 없는 상품의 디자인을 하기에는 이해가 너무 부족했다. 영화 `왓 위민 원트`의 멜 깁슨처럼 여성의 마음이 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민을 털어놓은 상대는 나와 가장 가까운 여성, 아내였다.
“한 손으로도 쉽게 꺼내서 거울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내는 손거울을 따로 들고 다니지 않고 콤팩트 하나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은데, 운전을 하다가 잠깐 얼굴을 보고 싶을 때 콤팩트 뚜껑을 여닫는 것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아내가 불편했던 점들을 털어놓자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다.
기존 폴딩 방식 콤팩트에서 벗어나 세계 최초로 슬라이드 개폐 방식의 콤팩트가 탄생했다. 안쪽에 있던 거울을 바깥으로 빼내자 핸드백에서 한 손으로 꺼내 바로 거울을 볼 수 있었다. 거울에 분가루가 묻어 뿌옇게 되는 문제도 해결했다.
이 제품은 가을 신상품으로 출시돼 출시 2주 만에 무려 5만여개(약 11억원)가 팔려 나갔다. 이는 다른 콤팩트의 한 달치 판매 수량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1년간 약 200만개가 판매됐다. 사랑하는 아내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고민했던 것이 많은 여성들을 기쁘게 했다.
이노의 `바비 라인`도 아내만큼이나 나와 아주 가까운 여성을 위해 디자인한 MP3 플레이어다. 바로 나의 딸 수진이가 주인공이다.
1959년 마텔사 창시자 루스 핸들러는 자신의 딸 바바라를 위해 바비인형을 만들었다. 나 역시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될 내 딸을 비롯한 여성을 위한, 여성이 원하는, MP3 플레이어를 기획했다.
마텔사 경영진에게 바비 브랜드와 협력해 MP3 플레이어를 개발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뜻밖의 제안에도 마텔사는 망설이지 않고 흔쾌히 동의했다. `이노 BO` 모델은 2008년 당시 `원더걸스` 멤버들이 직접 디자인에 참여해 `이노 WO`라는 이름으로 특별버전까지 선보였다. 어린 여성의 목소리를 디자인에 직접 반영시키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리서치라는 원론적 방식 대신, “일상에서 출발하라”고 디자이너들에게 말한다.
나는 일상의 불편을 참지 않고 기술로써 그 기능을 개선하는 발명가와 비슷하게 아이디어를 얻는다. 나와 발명가의 차이는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사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내가 만드는 물건을 다른 사람도 좋아하도록 만드는 직업이 바로, 디자이너다. 좋은 디자인 아이디어를 얻는 매우 쉬운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이다. 우리는 선물을 고르면서 어떤 것을 고르면 그 사람이 더 웃을지 고민한다. 디자이너는 어떤 모양과 질감과 색을 골라야 소비자가 더 좋아하고 기분 좋게 사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이것이 바로 디자인의 목적이다. 김영세 이노디자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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